우리 속담에 “미운놈 떡 하나 더 주라”는 말이 있다. 떡의 말뿌리를 살펴보면 15세기 중세 국어 문헌에 ‘ㅅ덕’으로 표기되었다. ‘월인석보(月印釋譜)’(권42), ‘훈몽자회(訓蒙字會)’(중10) 등에 나타나고 있다.

심마니의 말에 떡을 ‘시덕’(함경), ‘서더구’(평안), ‘시더기’(강원)라 함을 보고 중세 국어의 ‘ㅅ덕’의 ‘ㅅ’발음이 되었다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다.

고대 일본에서 제사 때 쓰인 쌀떡을 ‘시도키(sitoki)라 한 사실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먼 원시 농경시대부터 떡을 해 먹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낙랑 유적에서 청동제 시루와 토기 시루가 보이고,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시루가 발견되며, 고구려 벽화에는 시루로 음식을 찌는 모습이 보인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신라의 유리와 탈해가 떡을 이로 물어 떡에 난 잇자국(잇금) 수로 왕위를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랑 죽지랑은 부역하는 친구 급간을 데리러 갈 때에 술과 떡을 가지고 갔다고 했다.

‘가락국기’에는 나라 제사 지낼 때 떡을 올렸다고 하였다.

세시가 뚜렷한 우리 나라는 절기에 따라 달마다 떡을 해 먹었는데, 떡은 그 달의 명절과 깊은 걸림이 있다. 서울 지방의 구전 민요 ‘떡타령’은 떡 장수가 떡을 파는 소리로, 별식이요 시절 음식으로서의 떡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정월 보름달떡이요/ 이월 한식 송병(松餠)이요/ 삼월 삼짇 쑥떡이로다/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사월 파일 느티떡에/ 오월 단오 수리치떡/ 유월 유두에 밀전병이라/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 칠월 칠석에 수단이요/ 팔월 가위 오례 송편/ 구월 구일 국화떡이라/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시월 상달 무시루떡/ 동짓날 동짓날 새알심이/ 섣달에는 골무떡이라/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두 귀 반쪽 송편이요/ 세 귀 반쪽 호만두/ 네 귀 반쪽 인절미로다/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먹기가 좋은 꿀설기/ 보기 좋은 백설기/ 시금털털 증편이로다/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골방 도련님 필낭(筆囊)떡/ 각집 아가씨 실패떡/ 세 살 둥둥 사래떡이로다/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 서방사령(書方使令)의 청궐편/ 도감포수(都監砲手) 송기떡/ 대전별감(大殿別監) 새떡이로다/ 떡 사오, 떡 사오, 떡 사려오’이와 같이 우리네 떡은 살면서 애길사(哀吉事)에 나눠 먹던 정감어린 음식이었다.

서울 낙원동은 본디 중부 경행방(慶幸坊)의 교동, 탑동, 어의동, 주동과 정선방(貞善坊)의 한동, 관인방(寬仁坊)의 원동을 병합하여 1914년 4월 1일, 가히 도심 중앙의 낙원지라 할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즐거운 거리 낙원지 답게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우리떡의 맛갈스런 거리를 이루고 있다.

떡집만 하여도 낙원, 종로, 제일, 남문, 서울 등 즐비하니 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즐거운 떡전거리다.

거기에다 악기(樂기)상점까지 갖춰, 보고 즐겁고, 먹어 맛있고, 풍악소리를 들어 기쁜 그야말로 즐거운 ‘낙(樂)’과 ‘악(樂)’의 걸림이 있는 ‘낙원(樂園’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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