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자 보호법 시행 앞두고 우량은행으로 자금 돌려

수나라, 원나라, 청나라…

이들 세나라는 이민족이 중국을 정복해 세운 정복왕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중에서도 청나라는 한족을 가장 성공적으로 통치한 나라로 손꼽힌다. 그런데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 보다는 우연한 한 사건이 개입되어 있다.

1644년 명나라 수도인 북경으로 진격하던 청나라 군대는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의 방어벽을 뚫지 못해 고전하고 있었다. 그 즈음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북경에 입성, 명나라를 무너뜨렸으며 오삼계 역시 반란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다. 당연히 청나라의 중국 정복은 물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천운은 청나라에 있었다. 이자성의 부장인 유종민이 오삼계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잡아간 것이다. 격분한 오삼계는 “대장부가 자신의 여자도 지키지 못하다니…”라고 허탈해하며 휘하 20만 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해 버렸다. 산해관을 무혈입성한 청나라 군대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단숨에 격파하고 중국을 정복했다.


신용금고·종금사 자금이탈로 큰 타격

이처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우연한 사건이 대변혁의 단초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예금자보호법 대상범위가 2001년부터 원리금을 포함, 2,000만원까지로 축소되면서 수십조원의 자금이 대이동을 시작하는가 하면 ‘안정성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일부 금융기관의 경우 생존의 기로에까지 몰리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그동안 높은 금리를 쫓아 움직이던 시중 자금이 지난해 연말부터 대이동을 시작했다. 보다 안정된 업종으로, 같은 업종에서도 우량기관으로 인식된 기관으로 돈이 쏠리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안정성에 타격을 입은 상호신용금고, 종합금융업계는 예금자보호법을 의식한 고객들이 은행권으로 이탈하면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전국상호신용금고연합회에 따르면 신용금고업계의 경우 1997년말 27조2,368억원에 달하던 총수신 규모가 지난해 말에는 22조6,352억원으로 4조6,000억원이나 줄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자금유출 정도가 빨라져 지난해 12월 한달 동안에만 3,000여억원이 은행권으로 빠져 나갔다.

최근 나라종금의 영업정지로 업계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종합금융업계 역시 자금 이탈로 고심하고 있다. 1998년말 58조4,410억원이던 종금업계 전체의 자산규모는 불과 2년만인 1999년 10월말 현재 40조8,490억원으로 20%이상 감소했다.


우량·외국계은행 예금 크게 증가

반면 은행권은 우량 은행과 외국계 은행을 중심으로 자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달 21일까지 불과 20일 동안 시중은행의 예금총액은 10조4,522억원이나 늘었다.

외국은행 역시 1997년말 1조3,240억원이던 예금이 2조1,97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금융연구원은 이와 관련, “신용금고, 신협과 일부 종금사의 경우 우량 금융기관과 불량 금융기관의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예금보호 금액이 2,000만원으로 낮아질 경우 대규모 자금이탈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추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밝히고 있다.

‘업종간 자금이동’과 함께 더욱 큰 파장이 예상되는 것은 이미 일부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은행권의 양극화 흐름이다. 실제로 올들어 은행권에서도 우량은행과 비우량은행간 자금이동의 조짐이 벌어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대표적 우량은행으로 부상한 주택(1조9,562억원), 신한(9,430억원), 국민(2조7,263억원), 하나(8,169억원), 한미은행(8,087억원) 의 경우 올들어 2월9일까지 두 달동안 총 7조2,511억원의 예금이 증가했다. 반면 조흥(3,452억원), 평화은행(-2,157억원) 등은 경쟁은행에 비해 증가폭이 현저히 적거나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특히 지방은행의 경우는 대구, 부산은행 등 경쟁력 있는 일부 은행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은행권 2차합병 가능성 거론

금융권에서는 “예금자보호법 시행 6개월을 앞둔 5~6월께부터는 대형·우량은행으로의 쏠리기 현상이 더욱 심화해 소문으로만 나돌았던 은행권의 2차 합병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하고 있다.

자금이동과 함께 고객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예금 이자가 상대적으로 낮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상 정기예금보다는 6개월미만 단기 수신상품으로 돈이 몰리고 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두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금쪼개기도 두드러진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1년짜리 정기예금에 들때 1,800만원 정도로 나눠 여러 금융회사에 분산 예치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예금보호를 잘못 이해해 한 금융회사에서 여러 계좌를 트는 경우도 일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