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들이 겪은 고통, 보상 받아야"

태평양전쟁이나 한국전, 월남전 등 암울했던 현대사의 희생자들을 위해 미국에서 성공한 교포 변호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마이클 최(47·한국명 최영)변호사. 열일곱의 나이에 단돈 500달러를 갖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최변호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로펌을 설립할 정도로 미국에서 성공했지만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의 고통에서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태평양을 오가며 법정투쟁에 몰두하고 있다.

6일 4박5일 일정으로 귀국한 최변호사는 7일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140여명을 상대로 소송진행 설명회를 가진데 이어 잇따라 찾아오는 피해자나 유족들을 만나 상담을 하느라 하루 24시간을 쪼개 사용할 정도였다. 출국을 하루 앞둔 9일 숙소인 롯데호텔에서 최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현재 맡고 있는 소송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습니까.

“전쟁피해와 관련해 교포들로부터 수임받은 소송은 월남전 및 비무장지대 고엽제 피해보상사건과 태평양전쟁 강제징용사건, 정신대사건, 노근리 양민 집단학살사건 등이며 우키시마(浮島)호 폭파사건도 조사중입니다.

이중 월남전 고엽제 피해보상 사건은 담당 판사가 결정돼 3, 4월 중에 1심재판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희생자 손배소송은 지난해 12월 소송을 시작했고 이번 한국 체류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받은 진술을 추려 소송에 추가할 계획입니다. 노근리 양민 집단학살사건은 한미 양국이 진상조사작업을 벌이고 있어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소송 직전이거나 소송을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중입니다.”


-승소할 가능성은 있습니까.

“전쟁범죄 피해보상 소송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월남전 고엽제 피해보상 사건은 소송에 착수하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습니다. 승소 여부보다는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사건마다 다르지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태평양전쟁 강제징용자 피해보상 사건의 경우 한일협정으로 정부차원의 보상청구권은 소멸됐지만 개인의 보상청구권은 유효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 기업이 유태인 강제노역에 대해 53억달러를 보상키로 합의한 전례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평양전쟁 등 전쟁 관련 소송이 봇물을 이루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미국 정부가 전쟁 관련 피해자들을 보상하기 위해 민사소송의 시효를 10~20년 동안 중단한 특별법을 1992년도에 제정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미국내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기업이 전쟁범죄에 관련됐을 경우 재판관할권을 미국 법원이 갖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에 있는 독일 기업을 상대로 유태인 강제노역 피해보상소송이 제기됐고 태평양 전쟁 피해 한국인도 미국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단 손해배상은 피해자가 생존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한국인 피해자의 피해보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저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은 동학혁명 이후 불의에 저항한 선비나 그 후손은 모두 피해를 받은 반면 일제와 독재 권력에 아부한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조국의 현실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 미국의 판례들을 조사하던중 1984년 내려진 월남전 고엽제 피해자 보상 관련 판결을 알게 됐는데 한국군 참전자는 한명도 없고 미국인과 호주 등 3개국만 보상을 받았더라고요. 정말 미치겠더군요. 그래서 피해자들을 찾아 한국에 왔는데 당시 한국 정부도 이 분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침 고엽제 피해자 단체를 이끌고 있던 자민련의 박세직의원과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적극적으로 도와줘 소송까지 가게 되면서 태평양전쟁 희생자 피해보상 소송 등 나머지 일에도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됐습니다.”


-어려움은 없습니까.

“없을 리가 있습니까. 고엽제 피해소송은 7년동안 비용만 100만달러 이상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정부나 거대 기업의 잘못을 찾아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도청을 당하는 등 심리적 위협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일부에서는 수임료를 노리고 사건을 만들고 있다는 시선도 있는데…, 사실 수입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매달 한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큰 돈이 되지 않는 전범 사건에 관여하니까 회사직원들도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고엽제 피해자나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된다는 각오가 생깁니다. 저도 냉정한 사람이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눈물이 나올 정도입니다.”


-미국에서 성공하기까지 쉽지 않았을텐데요.

“열일곱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가 될 때까지 무척 고생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4~5시간 밖에 안잡니다. 뉴욕주립대와 스테츤 법과대학원을 마치고 필라델피아에 로펌(Choi & the Associates)를 차렸습니다. 직원은 40명 정도인데 다른 3개 법무법인과도 제휴를 맺고 전범소송 등을 공동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동양인이 미국에서 자리잡으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계획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도 동포들의 설움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질곡의 현대사를 살면서 피해를 당한 동포들이 살아있을 때 보상을 받을 수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미국에서는 정계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지난해 민주당 후보로 필라델피아 시장선거에 참여해 현재 부시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앞으로 10년내에 한국인 사상 최초로 연방상원에 진출할 꿈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적 힘이 있어야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권익보호도 가능합니다.”

최변호사는 미국내에서 주로 민사소송을 전문으로 하고 있지만 1998년 자신의 자녀 8명을 살해해 미국민을 경악시킨 ‘노(Noh)사건’ 변론을 맡는 등 형사사건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인 부인 샌디 최(46)씨와 지니(18), 수지(14) 등 두딸을 두고 있다.

송용회·주간한국부 기자 김명원·사진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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