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스프링(Long Spring)이 또 사고를 쳤군”

이장춘 외교통상부 본부대사(60·특1급)가 10일 문화일보에 외교부 인사와 조직의 난맥상을 비판한 글을 기고한 직후 외교부 간부들이 보인 첫 반응은 한마디로 냉소적이었다.

‘롱 스프링’은 이대사의 이름 장춘(長春)의 영어식 별칭. 한 간부는 “자기 조직에 침을 뱉는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면서 “떠날 때가 얼마남지 않아 마지막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대사가 5월까지 새 보직을 받지 못할 경우 외교관직을 떠나야 하는 대명퇴직 대상임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외교부내의 이런 반감은 그의 기고 파문 전력에 기인한다.

이대사는 1998년 1월 한국일보 기고문에서 “집시와 같은 직업 외교관만으로 구성된 외무부가 대외통상 교섭을 잘 수행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혀 외무부(당시 명칭)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외교통상부로의 확대 개편을 위해 옛 통산부, 옛 재경원과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내부에서 터져나온 통상흡수불가론은 외무부엔 ‘배반의 비수’나 다름없었다.

1999년 4월엔 동아일보 기고를 통해 “국가원수의 대표라는 상징성 때문에 국제적으로 높게 대우받고 있는 대사직급을 공무원의 국내계급에 준용하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자학행위”라고 일갈했다.

외교관도 다른 공무원처럼 다뤄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외부에서 보기엔 ‘쓴소리’였지만 내부자에게는 ‘허튼 소리’였다. 조직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해대는 그에게 동료들이 고운 시선을 보냈을 리는 만무하다. 그도 기자회견때 스스로를 “소신껏 행동하다 조직에서 왕따당한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독불장군·풍운아’엇갈린 평가

한때 그는 ‘잘나가는 외교관’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서울대 외교학 석사, 독일 본 법과대학 수료. 22세 최연소 행시(외교직)합격. 좋은 조건에 탁월한 판단력과 논리를 갖춘 그가 윗사람의 눈에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똑똑한 놈, 이장춘’으로 통하던 그는 1980년 10월 주 제네바대표부 참사관시절 고향(마산)선배인 우병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의 천거로 대통령 외교비서관에 임명됐다. 우씨는 이 비서관에 대해 “머리에 제왕학이 든 사람”이라고 평할 만큼 국정 전반에 걸친 그의 탁월한 식견을 높이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서관은 1982년 4월 우씨의 후임인 허화평 정무수석의 후원아래 여러 부처에 나눠져 있던 안보·통일·통상 외교업무의 창구를 외무부로 단일화하는 이른바 ‘외교현대화작업’을 추진한다. 외무부를 ‘파워부서’로 만들려던 그의 계획은 허수석이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밀려나면서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의 원대한 야심과 포부는 지금도 외교가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인 저돌적인 추진력은 일방적 독주로 비춰지기도 해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박철언 법무비서관, 노신영 외무장관과의 반목은 유명한 일화로 내려오고 있다. 북방정책이란 개념도 1983년 그가 이범석 장관의 국방대학원 특강 자료를 만들면서 구상한 것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이대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조직의 이단자에서 용기있는 내부고발자로, 독불장군에서 개혁의 풍운아로, 그는 자리의 부침만큼이나 상이한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천재성이 절제와 균형으로 적절히 제어됐다면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을 것”이라는 지적은 이대사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고 있다. 그랬다면 ‘풍운아 이장춘’은 나오지 않았겠지만.

김승일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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