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한 비밀통로, 경찰도 "기가 막혀"

“미성년 매매춘을 근절시키기 위해 여러분이 앞장서는 겁니다.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뛰어주세요. 비밀통로를 제일 많이 찾아내는 사람은 특박입니다, 특박. 알았죠?”

지난 7일 오후2시 서울 종암경찰서 앞마당. 125명의 건장한 의경이 부동자세로 대열을 이루며 서있다. 그앞에서 큰 소리로 훈시를 하고 있는 사람은 자그마한 키의 중년여성. 부임 1개월을 갓 넘긴 김강자 서장이다. 취임이후 ‘미성년 매매춘과의 전쟁’이라는 강행군에도 불구, 여전히 힘이 넘쳐 보였다. 그는 속칭 ‘미아리 텍사스업소’의 비밀통로 폐쇄여부를 확인하러 수하병력을 이끌고 손수 나서는 길이었다.

“제가 열흘 전쯤에 업주들을 불러서 비밀통로를 폐쇄하라고 일렀거든요. 폐쇄하지 않은 곳은 미성년 윤락녀를 고용해 영업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도 했습니다. 오늘 확인하러 나서는 겁니다”

“서장님, 비밀통로 확실히 있는 겁니까?” “좋은 그림 좀 잡게 해주세요”

황급히 달려온 몇몇 취재진은 숨을 다잡기 바쁘게 질문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김서장은 여유만만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차에 오른다.


감쪽같이 위장, 또다른 요지경

첫 방문지는 ‘꿈의 궁전’. 이 지역 250여개 업소 가운데 규모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형업소다. 하지만 내부에는 아무도 없고 매운 겨울바람만이 휘몰아치고 있다. 다들 자리를 피한 느낌. 김서장의 수색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의경들은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돌진한다.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것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이들의 목소리.

“어, 어디 갔어?”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없애버렸나 봐”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보니 과연 나무를 덧대어 못질을 한 흔적이 있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변화무쌍한 대형 미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그림거리 하나 건질수 있으려니 했던 취재진들이 실망의 한숨을 내쉰다. 김서장을 비롯한 종암서 관계자들도 당황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가벼운 웅성거림과 무거운 침묵이 묘하게 교차되는 가운데 5분 가량 흘렀다.

“여기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됐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던 취재진은 황급히 카메라를 들고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그곳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옷장이 있을뿐이었다. 커튼을 걷어봐도 거울밖에 없었다.

“자, 잘 보십시오” 김서장이 거울을 옆으로 밀어내자 여닫이 문이 나왔다. 여닫이 문 너머는 다른 업소. 탄성이 흘러 나왔다. 말로만 듣던 비밀통로를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신발장. 겉보기에는 여지없는 신발장일 뿐이었지만 그것을 당기자 계단이 나왔다. 계단이 연결되어 있는 곳은 2층 복도. 술방과 타임방을 갖추고 있는 여지없는 비밀장소다. 복도 끝에는 옆집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 여차하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거울 치우면 문, 신발장뒤엔 계단

한 집, 한 집 이동함에 따라 미아리 텍사스의 비밀통로는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주민들은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업주들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의경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업주들은 김서장에게 비밀통로를 없애겠다고 약속해왔던터라 하나둘 미로가 발견될 때마다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업주들은 “비밀통로가 아니라 비상통로”라고 항변해 보지만 눈앞에 드러나는 기상천외한 탈출구 앞에서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자, 이번에는 바닥입니다” 김서장은 한 업소의 술방에 들어가 바닥을 가리켰다. 눈으로 봐서는 이번에도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이미 취재진의 의혹어린 눈초리는 기대감으로 바뀐지 오래. 나무로 되어있는 바닥 한 모퉁이를 들어올리자 4m 정도 깊이의 은신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상시에 서너명 정도는 충분히 몸을 숨길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옆집은 더 가관이었다. 술상이 지하통로 입구를 완벽하게 감추고 있는 것. 술상을 옆으로 밀어내고 바닥의 한 부분을 들어올리자 여지없이 미로가 드러났다.

미로가 연결된 곳은 반지하 구조의 또다른 독립공간. 그 비좁은 공간에도 술방 서너개가 갖추어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간의 효율적 활용을 찬탄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취재진의 섣부른 감탄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번에는 천정위의 비밀통로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전천후 요새였다.

화장실을 뒤지던 의경 한명이 취재진을 부른다. 그곳에는 출입문 외에 좌우 양편으로 문이 하나씩 나있다. 왼쪽 문을 열어보니 도로가 보인다. 앞쪽으로 불시에 경찰이 들이닥칠 경우에 대비, 업소 뒤편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때 불안하게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업주 한명이 뛰어와 “비밀통로가 아니고 화재대비용 비상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업소에는 출입문이 하나밖에 없어 부득이하게 이곳에 비상구를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주장에 취재진이 고개를 끄덕거린 것도 잠시. 오른쪽 문이 다른 업소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업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물러난다. 옆집에서 자신이 빠져나온 통로쪽을 뒤돌아본 취재진은 또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문은 흔적도 없고 온통 거울로 꾸며놓은 벽이 있을 뿐이었다.


비밀통로 폐쇄할때까지 경찰배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별천지를 돌아다닌 지 2시간여. 실망으로 시작한 취재진의 감정이 놀라움과 감탄의 단계를 지나 무덤덤의 경지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대단원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듯 김서장이 갑자기 한 미용실에 들어간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반드시 무엇이 있으려니 하는 마음뿐. 김서장이 미용실 한편에 놓여있던 냉장고를 옆으로 치운다.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옆집이 업소였던 것이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올까말까 한 아주 작은 문이지만 비상시에 얼마나 유용할지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업주들은 점검도중 기회만 있으면 계속 취재진을 붙잡고 “오늘 방문한 곳 중 상당수가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며 영업중인 곳에서는 대부분 비밀통로를 폐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서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오늘 점검이 처음인 줄 아십니까? 그동안 의경을 동원해서 업소마다 모두 점검해 왔어요. 저희들이 100여곳 정도를 점검한 결과 70곳에 아직 비밀통로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오늘은 그중 일부만 보여드린거죠”환상 속을 헤매던 취재진이 이성을 되찾는다. 앞다투어 대책을 물어본다.

“당장 오늘밤부터 의경을 70개 업소에 고정배치할 겁니다. 비밀통로 없애는 순서대로 철수시킬 거고요.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인 점검을 통해 비밀통로 존재여부를 확인할 겁니다” 말을 마친 김서장은 차에 오르고, 의경들은 서둘러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회부 박진석기자


사회부 박진석 jseo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