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그거 인간 본능이잖아요"

내 말이 빠르다고? 진료할 때 환자랑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1분이나 2분 정도야. 남들같이 천천히 말하다간 그 시간에 몇마디나 하겠어. 또 난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것도 잘 못해. 이 바쁜 세상에 할 일도 많구만, 왜 말을 돌리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난 그런거 질색이야.

산부인과 의사 중에 내가 환자와 가장 많이 상담할거야. 환자에게 물어볼 때도 아주 꼬치꼬치 많이 물어보는 편이야. 첫 관계가 언제였느냐, 지금까지 몇 명이랑 관계했느냐, 현재 관계하는 남자의 수나 기간 등등은 기본이구, 어떻게 보면 별 걸 다 묻는다 싶을 만큼 구체적으로 물어봐. 물론 치료를 위해서지.

그럼 환자가 잘 대답하냐고? 그럼! 어떨땐 묻지도 않은 남자친구의 ‘힘’자랑까지 하는 애도 있다니깐. 하룻밤에 몇번을 했느니, 스키장에 가서 ‘현지용’으로 만난 남자가 너무 기술이 좋았는데 자기 남자친구가 그 남자만큼 만족시켜줄지 고민된다는 애도 있어. 오죽하면 내가 “별 자랑을 다 한다, 얘”라고 면박을 줘도 오히려 나한테 핀잔을 준다니깐. 오르가즘 운운 하는 여자애도 많고, 세상에 20대 초반의 애들이 벌써 무슨 성의 쾌락을 안다고 그런 고민을 하는건지, 어떨땐 산부인과를 섹스트러블 상담소로 알고 온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날 때도 있어.


우리나라에서 불륜얘기 제일 많이 듣는 사람

중년 여성도 옛날같지 않아. 아주 난리부르스야. 요즘 부부는 그런다잖아. 한밤중에 자다말고 옆자리의 이불을 한번씩 만져본다고. 혹시나 남편이 밤중에 일어나 나갔을까 봐 확인하느라고. 소위 불륜이란거, 아마 내가 대한민국에서 불륜얘기를 가장 많이 들을걸. 워낙 오랫동안 신문, 잡지랑 방송에서 상담활동을 하다 보니까 ‘저 선생님은 내 얘기를 잘 들어주겠구나’하고 자기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많거든.

예를 들면 “남편이 있는데 딴 남자랑 잤다. 그런데 임신이 됐는데 누구 애인지 모르겠다”는 경우같은거. 그래서 임신한 날짜를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고 외도 끝에 그만 남편에게 성병을 옮겼는데 직접 비뇨기과로 가보라고 말하다간 들통날 것같으니까 병원에서 약을 받은 뒤 식사때 국에 몰래 타서 남편에게 약을 복용시키는 여성도 있어. 그리곤 ‘삼국지의 조조도 생각못했을 아이디어’라고 자기 스스로 자기의 묘안에 감탄하더란 거 아냐.

이런 불륜이 뭣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해? 서갑숙씨 책이나 TV의 불륜드라마같은 것 때문에 자꾸 바람이 나는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역사적으로 훑어봐도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야.

인간의 본능 그 자체란거지. 남자의 외도야 아예 기본 상식처럼 사회적으로 묵인돼 왔다 치고, 여자는 상대적으로 그런 성적 쾌락을 취할만한 경제적, 사회적 힘이 없어서 그저 참아왔을 뿐이란 얘기야. 사실 옛날에도 이미 그럴만한 위치나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던 귀족층의 여자들은 이미 남자와 똑같이 놀았어.

서양 중세때만 해도 얼마나 난잡했는지 상상도 못해. 고야라는 화가 있잖아, 그도 한 귀족부인의 초상을 그려주다가 사랑에 빠졌는데 여자쪽에서는 그저 이 남자를 잠깐 갖고 논 것뿐이더라구. 그러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이젠 보통의 여성도 서서히 자기능력이 생겼거든. 교육을 받게 되고 직업을 가지면서 직접 경제력을 갖게 된거야. 그러니까 그전엔 참고 있던 본능이 서서히 밖으로 튀어나온거지.


불륜은 인간본능, 점점 남녀 구분 없어져

‘잠재돼 있던 행동’이냐고? 그 표현도 맞지 않아. 그냥 ‘본능’이라니깐! 그러니 무턱대고 욕만 할 일도 아니야, 내 생각엔. 요즘 여성들 봐. 결혼했어도 남편이 싫으면 “나, 너 싫어”하고선 다른 남자를 찾잖아. 이혼도 점점 쉬워져. 또 미혼여성만 해도 동시에 몇 남자랑 관계하는 여자도 있고, 남자가 여자를 자주 바꾸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랑 몇 달만 사귀다간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그런 경우도 있어. 그게 현실이야.

그런걸 볼 때 내 생각? 요즘 세태니까 ‘그것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법’이란 식으로 받아들이는거냐고? 그건 전혀 아니지. 좋다 나쁘다를 말하라면 당연히 나쁜거야. 그렇게 하면 에이즈도 생길 수 있는거고, 베토벤 귀먹은 것도 매독때문이잖아. 좋긴 뭐가 좋아, 나쁘다는걸 알면서도 컨트롤이 안되는거지. 그게 문제야. 솔직히 산부인과 의사인 나도 요즘은 진정한 사랑이 뭔지 헷갈려.

우리는 원래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라서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남자라도 일단 시집만 가면 평생 그와 함께 해야된다고 배웠어. 그런데 2~3개월 전부터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게 뭐냐면, 가장 중요한 건 당사자의 행복이란 거야.

즉, 어떤 것을 취해야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가, 그게 기준이 됐다는 소리야. 예를 들어 어떤 여자애가 남자친구랑 겁없이 놀다가 임신을 했어. 그런데 엄마가 반대한대. 남자 집도 가난하고, 여러모로 고생길이 훤하다는거야. 그런 경우 예전의 나라면 “네가 순결을 바쳤으니 평생을 그 남자에게 바치라”고 말해줬을거야.

그런데 이젠 아니라니깐! “네 엄마의 말이 일리 있다, 재출발하는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어져. 왜,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도 시한부 인생의 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잖아. 옛날의 나같으면 펄쩍 뛸 일이지.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냐. 정말 네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남은 몇 달이라도 마음껏 그와 즐겨라. 그 시간은 네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않는다. 임신을 해서 아기를 갖게 됐더라도 낳고 안낳고는 그가 떠난 뒤 차후에 네가 선택할 문제이고, 지금 네게 가장 중요한 건 네 행복이라고 말할거야.


친구들 사이에 ‘걸어다니는 잡지’로 불려

내 행복은 어떤거냐고?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서 행복을 느껴. 다른 사람은 너무 힘들고 단조로와서 의사 안 하는게 소원이라지만 난 이렇게 사는게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 의사로서 진료를 하는 것, 상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난 친구 사이에서도 ‘걸어 다니는 잡지’로 불려. 워낙 얘깃거리가 많잖아.

그리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잖아. 그렇다고 그림이나 글을 취미생활 수준으로 보면 안되구. 개인전만 3차례에다 약 40회 정도 국내외 전시회를 가진 정식 미협회원에다 소설가협회 회원이야. 최근에 낸 ‘여자가 감히?’를 비롯해서 책도 여러권 냈고, 이 분야의 인터넷 상담도 아마 제일 먼저 시작했을걸.

나, 진짜 부지런하게 살고 일도 무지 많이 해. 매일 새벽 6시40분이면 일어나서 운동하고나서 병원에 나와 종일 환자 돌보지, 저녁이면 집에 돌아가 그림 그리지, 책 읽지, 하루종일 뭔가를 해. 특히 난 책을 진짜 많이 읽어. 소설뿐 아니라 사회, 역사, 문화, 물리학 등등, 내가 스티븐 호킹 죽이게 좋아하잖아. 장르 안가리고 골고루 다 읽어.

최근엔 ‘앙리3세’랑 ‘클레오파트라’를 읽었는데 난 정독이면서 속독에다 다독이야. 워낙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다보니 읽는 속도도 ‘책 꽤나 읽는다’는 사람보다 열배쯤은 빠를걸. 그래도 글자 하나 안빠뜨리고 다 봐. 다섯권짜리 ‘클레오파트라’도 이틀만에 다 읽었어. 틈만 있으면 책을 들거든. 가령 환자가 진찰대 오르기전 옷 벗는 시간 있잖아, 그럴때도 난 책을 읽어. 그리고 아이들이 미국에 있어서 한국에서 3주일, 미국에서 2주일씩 오가면서 살아.

그렇게 바쁘게 살면 너무 정신없지 않냐고? 천만에. 그건 뭘 모르는 소리야. 나는 1초를 아껴쓰는 사람이야. 클린턴이 동시에 다섯가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난 여섯가지를 해. 그만큼 시간을 조직적으로 쓰고 집중력도 높은거지. 난 이제까지 한번에 한가지 일만 해본 일이 없어. 집에서도 그냥 텔레비전만 보고 있질 못해.

그림을 그리면서 TV를 보거나, 책을 보든가 뭘 하면서 동시에 TV를 보지, 시간이 아까와서 어떻게 한가지만 하고 있어? 그만큼 시간을 타이트하게 쓰니까 그렇게 많은 일을 처리하고도 잠 잘 것 다 자고, 사업하는 남편이랑 거의 매일 데이트도 한다는거 아냐. 이건 어려서부터 몸에 밴거야. 부모님이나 가족 모두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기도 하고, 내 평생 단 한번도 게으르게 살아본 일이 없어.


하기싫은 의대공부, 지옥같던 레지던트 시절

의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원래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써서 아버지가 국문과에 가라고 했었어. 그림도 어렸을적부터 잘 그렸고. 그런데 왜 그 길로 안나갔냐고? 중3때 “그 스트레스 주는걸 뭐하러 택하나”하는 생각을 하고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은거야. 그런데 내가 약간 ‘날라리과’잖아.

의대(이화여대)에 들어간 뒤 얼마나 공부가 하기 싫었던지, 보통 의대생은 공부벌레잖아. 그런데 나는 걸핏하면 수업 빼먹고 등산클럽이다 뭐다 해서 놀러다니고 디스코텍 가고, 나이트 클럽 다니고 그러니 성적이 좋을 리가 있겠어. 자칫하면 낙제할뻔 했었어. 본과 3학년때 남편을 만나서 시집가겠다고 했을 땐 집에서 완전히 난리가 났었어.

결국 부모님이 남편한테 “내 딸을 데려가더라도 남은 공부는 꼭 마치게 하겠다고 약속하면 딸을 주겠다”고 다짐받은 뒤에 결혼을 시키셨는데,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졸업을 하게 된거지. 도중에 공부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도 남편이 “부모님과 약속했다”면서 봐주질 않았거든.

의대졸업후 3년 정도 쉬었다가 우연히 알고 있던 한 병원장님의 권유로 인턴을 시작하면서 다시 이 길로 돌아왔어. 사실 처음엔 산부인과로 올 생각도 없었어. 내 얼굴을 한번 봐. 어디 산부인과하게 생겼나. 그냥 잘 놀게 생겼잖아. 그런데 레지던트가 될 때쯤 셋째 아이를 가져서 배가 남산만했는데 눈치를 보니 아무도 날 받아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더라구.

내가 눈치는 오죽 빨라! 그런데 마침 친하게 지내던 산부인과 선생님이 받아주겠다며 오라고 해서 이렇게 산부인과로 온거지. 아휴, 그런데 그 고생을 어떻게 하나, 까마득하더라구. 세상에서 제일 힘든게 산부인과 레지던트 아냐. 산부인과 당직은 악명이 높잖아.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니 다른 과목처럼 수술 스케줄을 미리 정할 수 있길 하나. 분만예정 환자가 들어오면 아기를 낳을 때까지 계속 스탠바이 아냐. 그리고 어떻게 된게 아기들이 대개 밤에만 나오는거 알아? 더구나 난 애 셋이나 가진 몸으로 체력도 남같지 않지, 정말 레지던트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


난 행복한 의사, 3월부턴 젊은 날라리들과 영화공부

하지만 오늘까지 오고보니 이만큼 행복한 일도 없어. 오히려 신혼의 달콤한 향기까지 맡을수 있어서 늘 행복을 느껴. 특히 나를 찾아오는 환자는 주로 젊은 층이거든. 젊은 애들이랑 호흡하는게 너무 재미있고, 또 서로 잘 통해. 올해로 내 나이도 만으로 쉰. 하지만 나이같은거 전혀 못느끼고 살아.

내 관리도 얼마나 철저히 하는데. 남들 윗몸 일으키기 열번 할 때 나는 서른번씩 하고, 이 손톱도 30년동안 가꿨다는거 아냐. 스트레스도 별로 없어. 그림도 주로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는데, 내가 피곤하니깐 나무나 흙, 풀, 바다 등을 그리면서 함께 쉬는거야. 사람은 안 그려. 맨날 보는게 사람인데 뭐하러 또 사람을 그려.

또 노래도 좋아하고, 나 가수야. 노래방 책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불러. 박미경, 핑클 등 웬만한 공연도 다 찾아다니며 봐. 일이 많은데 그럴 시간이 나냐고? 클린턴한테 물어보라니깐. 그 사람이 “나 바쁘다”고 그러나. 시간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오히려 남보다 열배 더 일하고도 더 여유가 있다는거 모르지?

3월부턴 영화공부도 시작할거야.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이미 등록해놨어. 영화 ‘산부인과’ 제작에 참여(원작자 겸 의학고문)했을 때 너무너무 재미있었거든. 내가 보기엔 영화만큼 진보적이고 첨단의 분야도 없는 것 같아.

그 첨단도 배우고, 또 거긴 젊은 날라리들이 많잖어. 그 젊은 날라리들 만나러 가는거야. 날라리가 얼마나 순진하고 이쁜데! 건방진 꿈인데, 언젠가 병원을 그만두게 되면 그땐 장편을 하나 써보고 싶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가렛 미첼은 평생 한편 썼대잖어.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 내 꿈이 건방져? 요즘은 국전에 낼 그림을 준비중인데, 만약 이번에 한번 붙는다면 그것으로 더이상 시간을 투자하진 않을거야. 그림도 ‘엔조이’니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산부인과 의사 아니겠어.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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