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현은 이미 1962년에 패왕전에서 우승한 타이틀 보유자로 조남철과 김인 시대를 넘나들며 복병노릇을 톡톡히 했던 감각파의 거두였다. 훗날 김희중, 서능욱 등 감각파의 귀재들이 줄을 잇지만 역시 속기파의 원조는 정창현이란 경상도 사나이였다.

서봉수가 명인이 된 다음에도 서 명인을 한참 아래 동생 대하듯 ‘함부로’독설을 퍼붓던 사람이 정창현이었다. 기사실에 유학파 엘리트 조훈현이 등장하자 서봉수의 자존심을 건드려 두사람 사이에 종종 내기바둑을 붙이곤 했던, 그야말로 스스럼없는 선배이기도 했다.

세인의 전망은 정창현의 절대우세로 기울었다. 당시 월간‘바둑’은 두사람의 승부를 예측한다는 제목으로 바둑평론가들을 등장시켜 승부를 전망하게 했다. 6인의 전문가들은 모두 서봉수의 패배를 예측했다. 당시까지 두사람간의 상대 전적은 서봉수가 2:0으로 앞서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명인전 관전기자인 권희철씨는 정-서의 승률을 6:4로 진단했다. 이유인 즉, 기풍이 똑같은 전투형이라서 관록에서 앞선 전창현이 낫다는 것. 또 한가지, 정창현의 입장에서도 당시의 바둑계 판도로 볼 때 타이틀을 딸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여서 사력을 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박재삼씨는 3:1로 정창현이, 이학진씨는 수치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서봉수는 거의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전망을, 그리고 최상두씨는 무려 7:3으로 정창현이 이긴다고 보았다. 조남사씨가 55:45로 꼽아 비교적 서봉수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이긴다는 것은 아니니 어차피 ‘오십보 백보’였다.

1973년 3월10일 벌어진 제 1국은 정창현이 좋은 바둑을 놓친다. 졌다. 정창현은 흑을 들고 견실하게 나갔으나 서봉수는 외목을 두기도 하며 대단히 자극적인 행마로 선배에 맞선다.

서봉수는 상대의 실리작전에 맞서 할 수 없이 중앙전으로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정창현은 중앙전에서 고지식한 수를 들고 나와 역전의 빌미를 허용하고 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바둑은 끝이었고 시리즈도 끝이었다.

3:0. 정창현은 부끄러웠다. 쟁쟁한 리그멤버를 모조리 셧아웃시키고 당당히 도전자가 된 것이 언제인데 내리 3연패를 당했으니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수 없을 지경이었다.

“패자 유구무언이다. 패장이 말을 한다는 건 변명이다. 부담이 컸다. 워낙 컸던 주변의 기대가 오히려 비참하게 지는 계기가 되었다. 승부에 집착하니 결국 졸작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창현의 국후담이었다.

반면 서봉수는 일년전에 비해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 “정말 요행이었다. 첫 방어전이라 열심히 맞서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운이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정창현 선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포석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봉수가 명인을 지킨 것이다. 참 의아한 일이었다. 다른 기전에서는 그리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면서도 유독 명인전에서 만큼은 힘을 쓰는, 그것도 괴력을 발휘하는 서봉수.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쉬운말로 그는 승부사였던 것이다.

그는 바둑을 낭만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것이 승부이지만, 이길 때는 이길 줄 알아야 승부사가 된다는 점을 그는 깨쳤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천부적으로 그러한 ‘헝그리 정신’을 타고 났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인심은 참으로 묘했다. 세상은 아직도 서봉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뉴스와 화제>

· 14세 조혜연, 여류최강에 도전

14일부터 제1회 홍창컵 결승서 최강 루이나이웨이와 3번기

14세 조혜연과 36세 루이나이웨이가 새천년 첫 바둑여왕 자리를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친다. 14일부터 이틀 간격으로 제 1회 홍창컵 결승3번기를 펼치게 된 것.

이미 조훈현과 국수를 타투고 있는 루이나이웨이의 우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양후이, 펑윈, 화쉐밍 등 중국 여류 3인방을 모조리 꺾은 신예 조혜연의 겁없는 돌진이 얼마나 먹혀들지가 관심사. 상대 전적은 1승1패로 호각. 채널46 바둑TV가 14일 오전10시부터 생중계한다.

· ‘팬티엄’이창호와 ‘386컴’최규병의 기성쟁투

이창호와 최규병이 14일 제 13기 기성전 도전 3번기 최종국을 펼친다. 이미 1승1패를 기록한 가운데 타이틀 향배를 결정지을 최종국은 최강 이창호에 맞서 ‘중견’386세대가 어느정도 분전할 지가 관심사.

역대전적 1승17패가 말해주듯 최규병은 이창호에게 철저히 당해왔던 더라 그가 타이틀을 따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지난 1국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창호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못한 느낌이라 승산은 반반.

진재호·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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