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밤 국회는 우여곡절끝에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16대 국회의원의 정수를 지금보다 2명 줄였다지만 ‘여성의 비례대표제 30% 할당’말고는 별로 개혁의 냄새가 나지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정작 관심을 끈 것은 선거법 개정안의 표결을 위해 전자투표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비밀투표와 민주주의를 마치 동의어나 되는 것처럼 수십년간 운영돼온 우리 국회의 관행에 비추어볼 때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표결의 대상에 올렸던 선거법은 ‘낙제점’이었지만 표결방식만큼은 충분히 개혁적이었다.

흔히 ‘민주주의의 교과서’처럼 말하는 미국 의회에는 비밀투표란 없다. 우리의 ‘표결’에 해당하는 ‘롤콜’(roll call)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출석점호’라는 뜻이다. 어쩌면 미 의회에서의 표결은 군대에서의 ‘출석점호’와 닮았다. 롤콜의 전형적인 예를 보자.

1999년 2월12일 주요 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미 상원은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의 표결을 실시했다. 의장격인 윌리엄 렝퀴스트 대법원장이 “지금부터 롤콜을 시작한다”고 선언하자 서기가 상원의원 100명의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호명당한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로 ‘찬성’(yea) 또는 ‘반대’(nay)를 말한뒤 앉았다. 찬반여론으로 몇달 동안 떠들썩했던 사안에 대해 의원들은 모든 미국인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것으로 표결은 끝났다.

그러나 하원의 경우는 의원의 수가 435명이라 상원이 하는 식으로 했다간 한번 표결에 몇시간씩 걸릴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전자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이미 민주·공화 양당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사안에 관해서는 우리의 국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장이 “이의없습니까”라고 묻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하원의장이 “지금부터 30분내에 투표를 실시해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각 의원들은 본회의장 곳곳에 마련된 투표기에 자신의 ID카드를 넣고 초록색으로 된 찬성 버튼 또는 빨간색으로 된 반대 버튼을 누른다. 한사람씩 버튼을 누를 때마다 전광판에는 ‘찬성 00표, 반대 00표’의 식으로 집계상황이 나타난다. 30분이 지나면 투표기는 동작을 멈추고 그때까지의 투표결과를 확정한다.

상원이나 하원의 표결 결과는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있다. 인터넷으로 상원이나 하원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어떤 법안이 누구에게서 발의돼 누구누구가 수정했고 결국 어떤 사람이 찬성해 통과됐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때문에 어느 특정 의원이 임기중 얼마만큼 입법활동에 충실했고 또 어떤 법안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표를 던졌는지를 누구나가 아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정치를 견제하는 시민운동이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선 표결의 방식이 복잡하기 짝이 없다. 헌법개정안의 경우만 기명투표로 정해놓았을뿐 행정부에서 보낸 법안, 인사에 관한 안건, 국회내에서의 선거 등은 무기명 투표로 해야한다고 국회법으로 못박아 놓았다.

그외의 안건에 대해 국회는 기명 전자 호명 또는 무기명 투표 등 4가지로 할 수 있고 그나마도 재적의원의 5분의1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한다. 결국 어느 의원이 어떤 입장을 밝혔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무기명 비밀투표가 표결 방식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사실 국회에서의 비밀투표는 우리 정치사에서 오랜 기간을 점유했던 독재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개투표를 한다면 압도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독재자의 의사에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때문이다.

지금도 당론에 반하는 표결을 하는 경우 지금도 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군사독재가 정치를 온통 지배하고 있던 때야 오죽했을 것인가. 그래서 ‘비밀투표는 곧 민주주의’라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잡았을 것같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독재정치의 시절에 왜곡됐던 제도와 관행은 이제 원칙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우리 국회도 모든 입법 활동을 투명하게 국민에게 보여주고 또 책임지는 쪽으로 과감하게 탈바꿈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장막 뒤에서 정치인들끼리만 해치워놓고 시민단체들에게 ‘제대로 된 기준을 갖고 우리를 평가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신재민 주간한국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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