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유산’(1999년 10월21일자 주간한국 ‘어제와 오늘’ 게제)은 파산될지도 모른다.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은 발발 50주년을 맞으며 ‘어찌 잊으랴(not forgotten) 전쟁’으로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1950년 7월26일에서 29일 사이 미 기병1사단 7기병연대 2대대 중대원 등이 저질렀던 학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다리 속에서 수백명의 피난민에게 가해진 미군의 ‘사살 행위“는 ‘어쩔 수 없었던 전투였다’는 쪽으로 가는 느낌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굴다리에서는 총성이 없어야만 했다’(No Gun Ri Bridge)는 입장에서 보는 시각 때문인지 몰라도 새해 들어 미국의 한국전 참전 용사회, 또 이를 후원하는 웹사이트들을 보면서 이런 느낌은 굳어진다.

그들만이 “어쩔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미국민, 적어도 한국전쟁을 아는 이들은 그들 편에 있다. 그래서 한국전쟁에 관한 기사는 50주년을 앞두고 미국에서 ‘흘러간 악극’처럼 유수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스티브 보겔 기자는 2월10일자 동정란에 뜻밖의 기사를 썼다. ‘한국전쟁으로 생이별한 부부, 국립묘지에 명예스럽게 안장되다’라는 내용의 기사였다.

안장된 이는 미 9사단 의무상사인 칼 깁슨 상사의 부인 그레이스 여사. 향년 88세였다. 그녀의 남편 깁슨 상사는 2차대전때 이탈리아 전선에서 동성 무공훈장을 받은 수훈자. 1950년 12월 중공군과 맞서다 북한에서 후퇴중 실종되어 1954년 사망으로 선고됐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체없는 안장식만이 치뤄졌다. 부인 그레이스 여사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신 없는 장례는 지켜볼 수 없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는 살아있다”고 밝힌 그녀는 그후 세월을, 남편을 기다리며 재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자 알링턴 국립묘지에 미망인도 합장할 수 있음을 알고 기뻐했다. 묘지관리 당국도 “깁슨 상사는 의장대가 행하는 장례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부인이 합장된다면 그녀의 장례식은 바로 그의 장례식이 된다”고 해석했다.

눈덮인 앨링턴 묘지에서 의장대는 지난 8일 그녀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한국전쟁때문에 생긴 그녀와 남편 깁슨 상사 사이의 ‘46년 이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이 기사는 또 ‘노근리 학살’로 빚어진‘악몽같은 한국전쟁’이라는 이미지를 ‘한번 맺은 인연, 죽을 때까지’의 부부애로 승화시켰다.

노근리 사건이 AP의 특종으로 보도된 것은 발생 49년이 넘은 1999년 9월29일이었다. 그러나 이 충격적 사건에 놀란 것은 한국전쟁을 잊지 못하는 숱한 웹사이트중 하나인 ‘Korean War’였다. 이 사이트를 만든 매트 커트가드는 해병 상사 출신의 인천 상륙작전 참전용사. 그는 올해 70세. ‘코리안 워’에는 AP의 노근리 사건 보도후 10월2일 ‘NO GUN RI’라는 주제가 별도로 생겼고 토론과 의견과 여러 기사들을 게제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것이 ‘라이언 일병 다시 찾다’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은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웅대함 속에 군인의 진한 조국애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속의 ‘라이언 일병’은 노르망디의 ‘라이언 일병’라는 사뭇 다르다.

경부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왜관의 미 캡 캐롤 병참기지에서 멀지 않은 산등성이. 50년전에는 303고지로 불렀던 이 산은 대구를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치는 북한군과 미 기병 1사단이 맞섰던 곳이다. 1950년 8월17일 프레드릭 라이언 일병은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지키다가 포로가 됐다.

고지 정상아래 큰 바위밑에 북한군은 67명의 미군 포로를 쇠사슬로 손을 뒤로 묶고 밧줄로 동여맸다. 밤이 되자 이들은 라이언 일병 등을 밑으로 굴러 떨어뜨린후 총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라이언 일병은 자신보다 몸이 큰 병사를 방패로 해 총 5발을 맞고 의식을 잃었다. 며칠후 미군은 이 고지를 다시 찾았고 라이언 일병은 장례미사가 행해지던중 의식을 찾았다. 이런 기적적 생환자는 5명이었다.

1999년 6월25일. 50년전 18세였던 라이언은 67세의 은퇴한 철도차장으로 다시 찾은 303 고지 정상의 그 바위에 앉아 뇌까렸다. “그날 다른 사람들은 공산군을 저주하며 죽어갔다. 나는 그들이 살아나 다시 죽더라도 이 나라(한국)의 평화를 위해 싸우리라 믿는다”고 했다.

‘코리언 워’ 웹사이트가 ‘라이언 일병’의 1999년 6월25일자 보스턴 글로브지 기사를 찾아낸 것은 바로 노근리 사건은 한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투일뿐이지 ‘집단살인’이나 ‘학살’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포로를 쇠사슬로 묶고 총살한 것이 학살이요, 범죄라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한 것은 북한과 중국의 공산군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도 평화를 누렸어야 할 한국 시민이 사살된 것에 대해서는 무언가 설명이 있어야 한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