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한나라당, 보스중심 구태정치 되레 강화

민주, 한나라당 양당 총수에게 16대 총선 후보공천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번 공천은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3년 남은 집권기간중 여당에 대한 장악력을 견고히 유지할 지렛대이기도 하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는 대권가도(大權街道)를 정비할 결정적 징검다리다. 차기 대선에서 자신이 당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는 터를 닦을 찬스이기 때문.

그래서인지 김대통령과 이총재는 이번 공천에서 자신의 정치력과 의중, 색깔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들 양 총수의 키워드는 ‘비주류 대숙청’을 통한 친정체제 구축.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방법론에 국한된다. DJ가 비교적 조용하게 처리했다면, 이총재는 충격요법을 채용했다. 이것은 ‘절대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라는 양자의 당내 입지 차이에서 비롯됐다.

경희대 임성호 교수(정치학)는 “실망스럽다”며 이번 공천을 총평했다. 임교수가 실망한 것은 3가지. 우선 이번 공천으로 독단적인 보스중심 정치체제가 강화된 인상을 받았다는 것.

시민단체가이 제시한 낙천 리스트를 비주류 제거에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것이 두번째다. 마지막은 최고 공천권자의 영향력이 극대화함으로써 공천기준이 자의적으로 적용됐다는 점. 임교수는 당 총수가 공천기준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전제했다.


한나라당 비주류 몰락, 이부영 득세

충격이 큰만큼 당내 반발도 거센 한나라당을 먼저 보자. 비주류 숙청은 계파보스 낙천과 계파지분 무시, 중진의원 물갈이 형태로 나타났다. 5선에다 ‘킹메이커’를 자부해 온 ‘TK의 맹주’ 김윤환(경북 구미) 의원이 눈을 뜨고 당했다. 그의 핵심측근인 윤원중 의원이 서울 송파을에서 고배를 마셨다. 대구에서는 박창달 위원장, 이원형 부대변인을 비롯한 대부분이 동반탈락했다.

또다른 한 축인 이기택 고문은 부산 연제에서 미끄러졌다. 이 고문은 “지역구에 출마하지 못할 경우 국회진입을 포기하겠다”며 배수진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고문계열의 민주동우회 인사들도 줄초상을 만났다. 공천을 신청한 계파 72명 중 부산의 손태인(해운대 기장갑), 허태열(북강서을) 위원장 등 극소수만 티켓을 얻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계열에서는 신상우, 정재문, 김정수, 정문화, 김도언 의원 등이 추풍낙엽 신세가 됐다. 김광일 전 청와대비서실장과 박종웅, 김무성 의원만 선별구제됐을 뿐이다. 김덕룡 부총재가 지원했던 인사들 역시 칼을 피하지 못했다. 김 부총재 계열에 속하는 조웅규(경기 일산갑) 의원과 권기균(영등포갑), 정진섭(안양)씨 등이 우수수 떨어졌다. 김 부총재는 기존 계파 보스 중 유일하게 생존했다는 것으로 자위해야 할 판이다.

관록도 필요없었다. 이 총재의 칼날은 다선 중진의원도 가차없이 자르고 지나갔다. 불출마 선언을 했거나 와병중인 당내 6선 이상의 현역의원 6명 전원이 배제됐다. 7선의 신상우 국회부의장과 오세응, 황낙주 전 국회부의장, 6선의 김수한, 최형우, 이중재 의원이 그들이다. 이에 반해 이 총재를 둘러싼 측근과 신진세력은 ‘이부영 소계보’가 운위될 만큼 중용됐다.


신인대거등용, DJ후반기구도 엿보여

김상현 고문의 탈락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공천 역시 DJ식 ‘총선후 구상’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깃발만 꽂아도 되는 텃밭 호남에는 측근들을 심고, 승부처인 서울과 수도권엔 ‘예비 친위부대’인 30~40대 신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때가 되면 역린(逆鱗)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김상현 의원을 비롯해 박정훈, 김종배 의원이 된서리를 맞았다. 그나마 소수이던 비주류가 타격을 입으면서 ‘비주류 소멸론’이 제기되고 있다. 김충일, 홍문종, 황학수 의원 등 영입파들도 당했다. 이들 영입파 의원들은 입당 당시 당지도부가 재공천을 약속한 터라 정치신의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표면적으로는 핵심세력인 동교동계도 타격이 적지 않다. 불출마를 선언한 권노갑 고문을 포함해 최재승, 윤철상 의원도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했기 때문. 하지만 권 고문은 의원직에 관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관의 실세’. 최재승, 윤철상 의원은 비례대표로 원내진출이 예상되고 있어 동교동계의 손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세 사람의 희생을 디딤돌로 범동교동계인 이훈평(서울 관악갑), 정철기(전남 광양 구례), 배기운(전남 나주)씨 등이 보상을 받아 실질적으로는 득이라는 분석도 있다.

시민단체의 주장에 일견 귀를 기울인 듯 하면서도 당 장악력은 오히려 강화했다는 것이 민주당 공천에 대한 일반적인 평. 차기 대선을 향해가는 잔여 임기 동안 당내 잡음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DJ의 영향력을 온존시키자는 계산이 담겼다는 분석이다. 가까이는 올 9월께로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치러질 총재와 최고위원 등 지도부 경선에도 총수의 의중이 손쉽게 반영될게 분명하다.


시민단체들, 공천결과에 반발

시민단체들은 민주, 한나라당 양당의 발표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부 ‘구악(舊惡)’을 거세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공천과정의 비민주성과 시민단체 리스트 포함 인사들이 대거 생존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민주당 공천자 중 리스트에 오른 인물은 ‘3관왕’인 김봉호, 권정달, 김운환, 서석재, 이성호 의원을 비롯해 모두 34명. 한나라당은 ‘리스트 3관왕’ 김광원, 김기춘, 김종하, 김태호, 신경식, 이강두 의원을 포함해 46명이 회생했다.

문제는 공천탈락 의원의 반발. 친정체제 강화를 위해 단행한 진용짜기가 자칫 파열의 빌미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 김상현 의원은 DJ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하면서 무소속 출마나 신당창당 검토 의사를 공언했다. 김충일, 홍종문, 이영일 의원 등도 반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DJ가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는 상황이라 당분간은 반발력이 강할 수 없을 전망이다.

당내분의 가능성은 역시 지역보스를 중심으로 한 계파관계가 선명한 한나라당이 훨씬 크다. ‘2·18 대학살’로 피를 본 각 계파들은 이미 보스를 중심으로 활로 모색에 나서고 있다.

김윤환, 이기택 고문 등을 뒤따라 영남권의 동조탈당이 이어질 경우 이 총재의 ‘영남 교두보’구상은 초장에 틀어질 공산도 없지 않다. TK, KT, YS 계열이 한나라당의 판도를 사분오열시킬 수 있다는 것. 탈당인사 영입 기회를 노리는 자민련의 ‘이삭줍기’전략은 덩달아 힘을 얻을 가능성이 커졌다.

민주, 한나라당의 총재 직할체제가 완비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한 젊은 초선의원의 경험담을 토대로 16대 국회의 단면을 상상해보자. 우선 경험담. “국회에서 농성할 때 이런 명령아닌 명령이 내려온다.

‘50대 이하는 철야농성, 60대 이상은 귀가, 나머지는 알아서’. 몸싸움은 처음부터 못하겠다고 동원거부 선언을 했지만, 농성은 젊은 나이라 자원할 수 밖에 없다.” 16대 총선 후보공천에서 ‘젊은 피’가 늘고, 이에 못지 않은 혈기의 친위부대도 대거 발탁됐다. 16대 국회에서는 강행과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는 승강이를 심심지 않게 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