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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기업이 기업풍토를 바꾼다] "밀리면 끝" 사활 건 승부

'골리앗' 다국적기업에 맞서는 토종자본

주가로 보았을때 국내 최고은행인 주택은행의 최대 경쟁자는 누굴까. 대부분 “국민은행 혹은 신한은행 아닐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는 대답이다.

2000년 현재 주택은행의 겉으로 드러난 라이벌은 분명히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다. 그러나 주택은행이 미래의 가장 무서운 경쟁상대로 여기는 대상은 미국 뉴브리지 캐피탈로 넘어간 제일은행이다. 주택은행 관계자는 “제일은행이 신임 호리에 행장이 밝힌대로 소매금융 분야에 특화, 시장개척에 나설 경우 주택은행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제일은행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주택은행의 이같은 우려는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외국계 은행으로 변신한지 한달이 약간 더 지난 지금 제일은행이 보여주는 행보는 기존 국내은행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지난 1월31일 제일은행이 기업개선작업 대상인 (주)갑을에 대한 출자전환에 대해 홀로 반대표를 던진 것을 보고 제일은행이 정말로 ‘돈 되는 일만 하는 외국은행’으로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금융·유통 등 전분야에 걸쳐 맞대결

금융, 자동차, 유통, 정유, 화학 등 전 산업에 걸쳐 외국의 다국적 기업과 토종 자본의 사활을 건 승부가 벌어지고 있다. 일부 업종에서는 자본력을 앞세운 외국기업이 적극적 인수·합병으로 토종기업을 완전 제압했는가 하면 또다른 곳에서는 토종기업이 다국적 기업을 압도하고 있다.

2000년 2월 현재 외세의 도전으로 가장 짙게 전운이 드리워진 곳은 자동차 산업. 대우자동차 인수전에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세계적 자동차 회사들이 모두 뛰어들면서 30여년 동안 한국시장을 지켜온 현대자동차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대우자동차의 가장 유력한 인수후보인 GM을 견제하기 위해 포드와의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 “GM은 대우자동차를 아시아의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GM인수 불가론’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전황(戰況)은 현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헌재 재경부 장관 등이 대우자동차의 해외매각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는데다가 주가도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이다. 즉 GM의 대우차 인수방침이 결정되기 전인 지난해 8월초만 해도 4만원을 웃돌던 주가가 최근에는 1만4,000원대까지 하락한 상태이다.

A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정보통신주 주도의 장세에 밀리고, 지난해에 2조4,000억원에 달하는 유상증자로 수급여건이 나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자동차가 외국 자본의 대우차 인수를 계기로 전개될 국내 자동차업계의 판도 재편과정에서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국내 최고업체와 다국적 기업간의 맞대결이 벌어지는 분야는 자동차 산업뿐만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생활용품업계를 주름잡았던 LG화학, 제일제당 등 국내 업체들은 요즘 프로터앤드갬블(P&G)과 유니레버의 약진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1997년 12월 2,128억원을 들여 쌍용제지를 인수한 P&G는 이미 생리대 시장에서는 절대 강자로 자리잡았고 도브비누로 유명한 유니레버 역시 비누시장 점유율 1위 업체가 됐다. 이밖에도 코카콜라, 듀폰,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토종자본인 롯데칠성, LG화학, 한글과컴퓨터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쟁력 강화로 거대자본 압도하기도

외국자본의 자본공세로 국내 업체가 완전 몰락한 산업도 생겨나고 있다. 시장 규모가 연간 7,000억원에 달하는 신문용지 업계는 노스케스코그, 보워터 등 외국자본이 시장의 56.2%를 장악했으며 살충제인 에프킬러로 유명한 삼성제약은 존슨앤드선으로 넘어갔다. 질레트가 국내 1위인 로케트전기를 접수한 건전지, 흥농·중앙·서울 등 ‘빅3’가 외국자본에 투항한 종묘업계에서는 한국시장을 놓고 외국회사끼리의 맞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경영대학 이동기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전체 내수시장의 50%를 넘는 업종이 13개에 달한다”며 “외국자본의 국내 진출이 계속될 경우 국내 1~3위 업체와 다국적 기업이 벌이는 경쟁구도는 전 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또 “외국기업의 진출은 단기적으로는 국내 업체에게 부담을 주는 요인이 분명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교수의 지적대로 외국 거대자본의 진출이 오히려 토종업체의 경쟁력 강화로 연결된 경우가 있는데 그 대표적 기업은 1998~1999년 벌어진 ‘유통대전’에서 월마트를 압도한 E마트이다.

1998년 연간 매출액이 1,000억달러를 넘어서는 월마트가 마크로를 인수, 국내에 상륙할 당시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던 E마트는 월마트와의 두차례에 걸친 ‘가격전쟁’에서 승리, 국내 시장 점유율이 21.5%에 달하는 등 1위 자리를 완전히 굳힌 상태이다(월마트의 점유율은 5%). E마트 관계자는 “한국 소비자들이 중시하는 신선 채소류 분야의 유통망을 갖추지 못한 월마트의 약점을 공략, E마트가 국내 할인점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확보한 상태”라고 말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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