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밀린 경제, 개혁과제 총선이후로 연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982년전인 서기 1018년.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자 중국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거란이 고려 임금 현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쳐들어 왔다. 압록강을 건너 고려땅에 침입한 거란군은 소배압(簫排押)이 이끌었으며 그 숫자는 10만을 넘었다.

거란군을 맞아 고려에서는 현종의 명을 받고 강감찬 장군이 나섰다. 강감찬 장군은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흥화진과 귀주에서 거란군을 섬멸, 10만이 넘는 거란군중 살아 돌아간 사람은 2,000여명에 불과했다.

재미있는 것은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당시 고려군의 승리가 일대일 백병전을 통한 승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강감찬 장군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방심한 거란군을 의주 부근의 삽교천으로 유인해 쇠가죽으로 막았던 물을 단번에 터뜨리는 수공을 펼쳐 대승을 거뒀다.

총선을 앞둔 한국 경제가 마치 물빠진 삽교천 위에 서 있는 거란군과 비슷한 형국이다.

우선 겉으로는 삽교천의 봇물이 터지기 직전처럼 모든 것이 양호하다. 물론 1월 국제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코스닥 시장의 열기는 여전히 뜨겁고 시중에서는 여전히 돈이 흘러 넘치고 시중 금리도 한자리 수의 안정세를 보이고 경제성장률도 괜찮은 편이다.


선거악영향 우려, 정치부담 차단

그러나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공기업 민영화, 투신사 구조조정, 연금제도 개선안 등 국민 계층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따라서 정치적 부담이 될 만한 개혁과제가 모두 4월 총선이후로 연기된 상태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금융지주회사 설립과 국민연금을 포함한 각종 연금제도 개선대책이다. 이들 정책은 광범위한 공청회 등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필수적인데도 논의 자체가 4월 이후로 미뤄지면서 제도 개선 자체가 무산되거나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연금제도 개선안의 경우 당초 지난해말 마련될 예정이었으나 5월 이후로 연기된 상태이다. 재경부는 “연금 보험료 조정과 연금 수혜방식의 변화는 각계 각층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의견조정이 필요하다”며 연기의 불가피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연금제도 개선과 관련된 공청회가 열려 연금의 부실한 실상이 드러나고, 시민단체로부터 논란이 제기될 경우 벌어질 사태를 우려한 정부·여당이 의도적으로 처리를 미루고 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은행 주인 찾아주기’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금융지주회사 설립방안도 4월이후로 늦춰졌다. 64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권 구조조정의 완결판인 지주회사 설립문제 역시 ‘재벌의 은행소유’라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확산,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담배인삼공사를 포함한 공기업 민영화 문제도 당초 지분의 해외매각 원칙에서 국·내외 매각쪽으로 한발 후퇴하면서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밖에도 4월 이후로 미뤄진 투신사 구조조정과, 차츰 불거지고 있는 또다른 대기업의 자금악화설 역시 총선이후 경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거시경제정책, 정치적 판단이 좌우

개혁과제의 연기와 함께 각종 거시경제 정책이 경제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특히 지난 2월11일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과 이상용 노동부장관이 16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급작스럽게 장관직을 사퇴한 것은 아직도 한국에서는 정치논리가 경제논리에 앞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남궁 장관은 지난 1월 개각때도 민주당으로부터 출마요청을 받았으나 강력하게 고사, 장관자리를 지켰으나 ‘단 한명의 국회의원이 아쉬운 상황’이라는 여권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장관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내 결심은 아니고 저쪽(민주당) 결심”이라며 정치입문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올들어 공공사업 조기집행, 잉여예산의 복지부문 전용, 감세 등 재정부문에서 확장적인 기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문제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내놓은 ‘향후 경제운용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하나’라는 보고서를 통해 선거를 의식한 정부의 선심 정책이 지닌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뒤 “당분간 경제정책 기조는 현재의 안정추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중립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LG경제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이 왜곡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오정훈 연구원은 “현재 재정부문은 확장적 기조를, 금융정책은 단기금리가 0.25% 포인트 인상되는 등 긴축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밝힌뒤 “재정과 금융의 역할이 뒤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선거를 의식, 4조3,000억원에 달하는 1999년 세수증가 및 예산 불용액을 빈민보조비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재정적자 감축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오 연구원은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재정부문의 과도한 팽창은 우려 차원에서 그치던 인플레이션 압력을 현실화시켜 가까스로 안정된 금융시장을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실물경제상황 악화 조짐

경제개혁의 지연, 경제정책의 왜곡 등과 함께 나라 안팎의 실물 경제상황 역시 악화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임금인상을 둘러싼 노사간 갈등이 표면화하고 있으며 잠잠했던 일부 대기업의 위기설도 퍼지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총선이후 재계 서열 10위안의 대기업이 자금사정 악화로 쓰러질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외 여건 역시 낙관을 불허하는 상황이다. 급속한 경기 호전으로 올들어 1월중 수입액이 46%나 급증하면서 1997년 12월 이후 25개월 동안 이어진 무역흑자 기조가 깨졌다. 또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고, 일본 엔화도 약세가 지속되면서 수출전선에 빨간 불이 켜진 상태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총선이후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선을 유지하고 엔화 약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동안 정치논리로 억지로 묶여왔던 경제 현안이 4월13일 이후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경우 한국 경제는 다시 위기국면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는 물처럼 흐른다. 지금 당장 힘들다고 물을 가두기 시작하면 그 파괴력과 후유증은 엄청나다. 선거때문에 본질이 왜곡된 2000년 4월13일 이후의 한국 경제가 불안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