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백악관 주인 자리를 되찾으려는 미국 공화당의 대권후보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미 역사상 두번째 ‘부자대통령’ 탄생 기록에 도전하는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됐으나 의외로 조지 맥케인 전 상원의원이 선전,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출신과 전력, 스타일, 성격 등이 너무나 판이하다는 점. 부시 주지사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치명문가 출신답게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탄하게 중앙무대에 진출해 대권을 향해 뛰고 있다.

반면 맥케인 의원은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위협받는 5년간의 베트남 포로생활을 포함해 숱한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명문가 출신 부시, 자질검증 안돼

부시가 대통령 선거출마를 선언한 것은 지난해 5월. 그 이전부터 가장 유망한 차세대 대권주자로 꼽히고 있던 그가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로 치솟았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 선거판 자체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정치자금 모금면에서도 부시는 역대 최고에 이르는 5,700만달러를 모금해 “역시 부시 가문”이라는 찬탄을 들었다. 이 금액은 민주당의 대권 주자인 앨 고어 부통령과 빌 브래들리 상원의원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그는 또 공식 대선전의 막이 오르는 뉴햄프셔 예비선거에 들어가기전 연방 상원의원 55명중 35명의 지지와 30여명에 가까운 주지사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 사실상 백악관을 향한 ‘줄세우기’를 끝냈다.

그의 약점은 젊은 시절의 사생활과 검증되지 않는 정치적 자질. “결혼 전까지 거칠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인정했듯이 복잡한 여성관계와 마약 복용설 등은 부시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그의 인생에 전기가 된 날은 1986년 7월28일이라고 한다. 바로 그 날 ‘40세 기념파티’에서 마신 술의 숙취에 시달리면서 술을 끊고 새출발하기로 결심했다는 것. 텍사스의 한 기업가가 그의 어려움을 알고 도와준 것도 그 때쯤이었다. 그는 그후 승승장구, 텍사스 레인저스 프로야구팀을 운영하다 1994년 이를 매각해 1,500만달러를 벌어들였으며 텍사스 주지사 선거전에서 압승을 거뒀다.


멕케인, 개혁적 이미지의 대중선동형

부시 주지사의 약점을 파고드는 선거전략으로 돌풍을 일으킨 맥케인은 ‘대중선동형’이다. 전통 보수노선을 걷는 부시와는 달리 개혁중도노선에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언변으로 지지 계층을 넓혀가고 있다.

맥케인이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하자 주요 주간지들은 일제히 그를 표지인물로 내세웠는데 ‘대중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솔직히 드러내는 투명한 선거전략’을 최대승인으로 꼽았다. 솔직 대담함이 빌 클린턴 대통령과 부시 주지사의 이미지와 대비되면서 인기를 더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부족한 선거자금과 동료 의원의 외면, 단선적인 선거공약, 급한 성격, 베트남 전쟁포로 시절로 인한 건강 문제, 재혼 경력 등 숱한 약점은 그의 ‘조기 사퇴’를 점치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점을 장점으로 바꿨다.그가 발로 뛰며 유권자들과 토론집회를 가진 것은 자금난 때문이지만 유권자들이 이를 워싱턴의 ‘인사이더 정치가’와는 다른 ‘개혁성향’으로 평가한 게 대표적인 케이스다.

또 베트남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팔을 어깨 위로 올리지 못하는 사실을 스스로 언론에 공개하고 미모의 젊은 부인에 빠져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 것에 대해서도 “첫 결혼의 실패는 순전히 나의 잘못”이라고 고백했다. 해군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그는 베트남에 참전했다가 격추되는 바람에 5년 반동안 포로생활을 하고 1973년에야 귀환한 전쟁영웅이다. 당지도부에 할말을 하는 강골이지만 거꾸로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도 있다.


고어, 앨리트귀족형의 준비된 후보

공화당에 비해 긴장도는 떨어지지만 민주당의 대선후보 결정전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원한 부통령’이란 혹평속에 변신을 거듭해온 앨 고어 부통령과 프로농구 최고의 스타 출신인 빌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의 인기 대결은 날이 갈수록 고어쪽으로 기우는 느낌이다.

반듯한 얼굴에 귀족티가 흐르는 고어 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 집권 8년 내내 백악관의 ‘제2인자’이자 명실상부한 후계자였다. 상원의원의 아들로 태어나 워싱턴의 호텔에서 살면서 명문고등학교를 나오고 동부 명문대학(하버드 대학 정치학, 밴더필드대 신학, 법학석사)를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귀족형이다.

부시 주지사와 마찬가지로 부친의 후광속에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나 40세까지의 인생역정은 크게 다르다. 부시보다 두살 아래인 고어는 1986년까지 ‘놀고 먹은’부시와는 달리 38세이던 그 해 이미 상원의원으로 명성을 쌓으며 대통령 출마를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비록 초반에 탈락하기는 했으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섰다.

1999년 가을은 고어에겐 시련과 변신의 시기였다. ‘준비된 대통령’을 지향하던 그가 지지도 등 모든 면에서 부시에게 밀리자 변화를 추구했다. 우선 딱딱하고 귀족적인 이미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넥타이를 벗어던졌다.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더욱 화사한 색상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유권자들과 직접 만나는 ‘타운미팅’을 갖도록 권한 딸 카레나 고어 시프의 권유도 받아들였다. 이런 변화는 유권자들에게 더욱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고어 부통령이 불과 몇달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고 평가했다.

그에게도 약점은 있다. 아이디어가 다양하고 선이 굵은 브래들리 전의원과는 달리 고어는 너무 세부적인 사안에 집착하는 바람에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래서 그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 추진된 정보고속도로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잇단 스캔들에 식상한 국민의 편견을 없애기 위해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했다.


브래들리, 프로농구스타출신의 다크호스

클린턴 대통령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고어 부통령의 ‘핀치히터’(대타)로 주목을 받은 브래들리는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세의 열세를 실감하고 있다. 유권자의 새로운 인물론에 호소해온 그는 특히 뉴햄프셔 예비선거를 앞두고 심장질환이라는 건강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또한번 제동이 걸렸다.

그는 프로농구의 스타 출신답게 1979년 정계에 입문한 뒤 뉴저지에서 내리 3선을 기록했는데 빈곤퇴치, 인종차별 철폐 등 정책면에서 고어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라는 평가다.

고어가 민주당의 기간조직인 노조와 흑인계층의 지지를 겨냥, ‘책임있는 복지정책’을 내세우자 브래들리는 “고어의 정책은 보수주의와 다를 바 없다”면서 진짜 민주당 후보론으로 맞서고 있다.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고어에 비해 지지율은 줄곧 뒤져왔으나 공화당 후보와의 가상대결에서는 오히려 상대적 우위를 지켜 ‘본선용’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공화당의 맥케인과 마찬가지로 독자적 행동과 발언으로 워싱턴 정가에서는 ‘아웃사이더’로 분류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나 민주당 조직표를 기대할 수 없는 게 가장 큰 약점이다. 미주리주 출생으로 1965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대학 (로즈장학생)을 거쳐 프로농구 선수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