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고 뭐고 전부 확 불 질러버리고 오늘로 끝내버려?” 더 ‘증세’가 심해진 날은 찾아온 후배들을 붙잡고 농담을 빙자해 한수 더 강도를 높인다. “이 극장 문 닫는 날이 바로 ‘홍대 앞’이라는 지명이 사라지는 날이 될거야. 오, 그래. 하지만 너희들은 미리 피신시켜주마”

행위예술가 심철종(40)씨는 정말 ‘목숨 걸고’ 오늘을 사는 남자다. 서울 홍대 앞의 극장 ‘씨어터 제로’의 대표, ‘심철종 퍼포먼스 제작소’의 대표인 심씨. 처음 한두 마디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대형사고를 낸 뒤 세상을 뜰 것 같지만 사실은 말처럼 ‘콱 죽을 수도’ 없는 그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극장을 시작하면서 얻은 빚 몇 천만원은 어쨌거나 갚아놓고 가야된다는 것. 둘째는 ‘죽을 때 죽더라도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죽는다’는 것이다.

“요즘 극과 극을 오가며 삽니다. 재작년 이 극장을 마련했을 땐 뭣보다 내가 원하는 공연, 내 공간에서라도 마음껏 해보자고 시작한건데…. 그렇게 하자면 극장경영 문제도 잘 풀어가야 되고 동시에 배우의 입장에선 내 작품이나 공연에 집중해야 되고. 단순한 머리로 두 가지를 다 하자니 정말 골치가 아픕니다.

특히 우리같은 공연예술분야는 다른 장르와는 달리 살아있을 때 평가받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거든요. 하다못해 화가들은 생시에 평가받지 못해도 죽은 뒤 남긴 그림으로 평가받을수 있지만 공연이란건 그 시간에서나 존재하는거지 가령 죽은 뒤에 비디오로 작품을 본들 그것은 기록일뿐 더 이상 예술로서의 가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로선 그래서 더 절박한거죠”

나이 먹는 소리가 시계의 초침소리처럼 들린다. 현실은 생각처럼 풀리지도 않는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끝내버리겠다는 으시시한 농담도 그만큼 속이 타서 해보는 소리다.


언더그라운드 최전방에서 고군분투

“전 좀 과격합니다(웃음). 욕심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과격하지 않으면 또 못버텨나가는게 우리같은 사람입니다. 독하고, 과격하고. 내가 나한테 강한 최면을 걸지 않으면 언더그라운드에선 못 살아갑니다. 방법은 딱 두가지뿐이예요. ‘저는 불쌍한 놈이예요. 도와주세요’라고 완전히 수그리든지, 아니면 ‘넌 늬 마음대로 해. 난 내 맘대로 할거야, 씨x 놈들아!’라고 세게 나가든지, 둘중 하나죠.

전 원래 약한 놈이지만 약한 걸 노출하고 싶진 않아요. 약하면 당하니까! 내가 부러져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강한 편이 낫습니다. 저도 한때 죽음의 늪을 헤맨 적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언더에서 별 지랄을 다 하고 살았는데. 지금도 죽을 끓여먹든, 밥을 끓여먹든, 저는 저대로 떳떳하게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요. 또 그만큼 제 나이도 먹었구요”

국내 행위예술계의 거두로 알려진 무세중씨로부터 사사, 20여년간의 공연 경력에다 특히 1990년대 공연작 ‘햄릿머신’과 모노드라마 ‘개’ 등을 통해 제법 이름이 알려진 심씨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딛고선 행위예술계는 언더그라운드중에서도 최전방의 언더그라운드. 썰렁한 객석의 현실조차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관객이 아무리 많은 날도 공연장 하나를 꽉 채워본 일이 없다. 어떤땐 서너명을 앉혀두고 공연할 때도 있다. 그런 날 분장실에 앉아 있으면 자신이 꼭 우시장에 팔려나가는 소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스승 무세중씨의 영향때문이겠지만 아직도 행위예술을 ‘남자도 벗고 뛰는’ 예술쯤으로 아는 이가 많다. 그런 관객에겐 심씨의 공연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의 퍼포먼스엔 벗는 대목이 별로 없다. 많이 벗어봐야 웃통 정도. 대신 소리와 동작, 영상이 그의 주요한 의사소통 도구다.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화제가 돼 초청공연을 다녔던 작품 ‘개’에서는 시종 개짖는 소리만 내다가 내려왔다. 현대인의 표상인 한 샐러리맨이 개로 변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대사 하나 없이도 충분히 할 말은 다 할 수 있었다.


터 잡는곳마다 ‘사고뭉치’로 찍혀

퍼포먼스의 기본은 대사의 철저한 절제. 파격적이고 실험성짙은 작품이 주종이다. 1997년 한강 둔치공원에서 마련된 ‘자동차씨 모의재판’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모았다. 해질 무렵 야외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을 갑자기 뚫고 나온 자동차.

문예진흥원의 실험극 부문 첫 지원사업이기도 했다. 약 1년전엔 온 주변을 횃불을 밝힌채 패션모델 150여명이 극장건물을 에워싸는 이색 오픈기념행사로도 눈길을 모았다. 행사 자체도 장관이었지만 당시 소요된 비용은 김밥 값으로 지불한 300만원이 전부. 정상적으론 기천만원이 소요될 대형행사를 디자이너와 모델협회, 음악인의 자발적인 공짜 지원사격으로 알뜰하게 치러낸 또하나의 히트작이었다.

한편, 꼭 반가운 화제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로 극장가는 물론, 자리잡은지 고작 1년 남짓 지난 지금의 극장 인근 주민에게도 심씨는 ‘사고뭉치’로 ‘전과’가 많다. 1980-1990년대 대학로 극장주인 사이에선 ‘심철종만 오면 사고가 터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그러했다. 어느 소극장에서는 무대환경을 바꾼답시고 그가 극장 전체에 온통 종이를 발라놓는 바람에 공연이 끝난 뒤 종이를 일일이 뜯어내느라 극장주가 혼쭐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공간사랑 공연때도 갑자기 공연중 불이 나 허겁지겁 불을 끄느라 일대 소동. ‘개’ 공연때는 같이 무대에 오른 개도 한 몫 거들었다. 가는 공연장마다 개똥을 선사한 것이다.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신촌으로 터를 옮긴 뒤에도 여지없이 또 한건. 지난해 현재의 극장 옆 주차장에서 퍼포먼스 ‘99 스트레스 굿’을 펼칠 때였다.

‘삼청교육대’라는 그룹의 락공연에다 그가 좋아하는 횃불 조명까지 한껏 고조된 가운데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며 힘껏 자동차를 부수는 순간, 자동차에서 연기가 치솟고 불이 났다. 급한 김에 동네를 샅샅이 뒤져 소화기 10대로 불길을 잡아보려 했지만 역부족. 결국 소방차 12대를 긴급출동시킨 가운데 그는 경찰서에 불려간데 이어 이튿날 즉결재판에서 1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그후 동네 집집마다 사과문을 돌리기도 했던 그는 이미 일대에선 ‘요주의 인물’. “제가 봐도 전 사고를 너무 쳐요. 그때 불나는거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야, 나이를 먹어서도 또 사고냐’ 싶더라구요. (워낙 전력이 많으시니 이젠 담담하시겠다고 말하자) 진짜 그래요! 이제 엔간히 사고가 나도 하나도 안 놀란다니깐요”


무세중씨 만나면서 내면의 정신과 에너지 분출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고 여렸다. 초등학교땐 그림 그리기가 특기였다. 상도 여러번 받았고 중학교때는 선생님이 “커서 꼭 그림공부를 해라”라고 조언할 만큼 소질도 있었다. 그러나 파일롯 출신의 아버지는 그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고 물감을 사주지 않는 것으로 당신의 뜻을 확실히 밝혔다.

공부라곤 전문대를 잠시 다닌 것이 끝. 당시 연극영화과에 다니던 친구로부터 “한번 연극을 해보라”는 말을 듣고 현대극단을 찾아간 것이 이 분야로 들어서게 된 첫 계기다. 이후 국립극장 연수원에서 1년동안 연기수업을 받은 데 이어 누군가 이름난 전문가가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무작정 그의 문하로 파고들었다.

당시 뉴욕대에서 막 돌아온 김수남 교수로부터 신체 트레이닝을 받은 것을 포함해 발레수업, 대사훈련도 그런 식으로 무작정 찾아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눌러앉아 배운 공부다.

무세중씨와의 만남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무씨가 독일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직접 무씨를 찾아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괴팍한 성미로 소문난 무씨는 작품 못지않게 훈련법도 독특한 스승이었다. 밤마다 촛불을 켜놓고 몇 십명이 모여 밤새 무당처럼 울부짖는 이상한 훈련을 받았다. 남들이 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기 꼭 알맞은 광경이었다. 이를테면 교주 무세중과 광신도들이 벌이는 기괴한 제의. 그러한 무씨의 가르침 아래 그는 자기 안에 든 정신과 숨은 에너지를 모두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점도 실험적 연극, 퍼포먼스, 전위예술쪽으로 맞춰졌다. 행위예술의 다양한 접근방법 중에서도 그처럼 연극쪽에서 출발한 행위예술가로는 무씨 이후 심씨가 거의 유일했다. 한때 또래의 젊은 연극인 친구와 어울려 대학로 극장을 돌며 그룹활동도 벌인 때도 있다. 공연비용은 각자 2만-3만원씩 갹출, 포스터 붙이기에서부터 무대출연까지 모두 해결해야 하는데다 공연수입이라곤 1년을 다 합쳐 채 40만원도 안되는 형편이었지만 가난해도 신이 났던 시절이었다.


좌절 속에서 공연‘개’로 인생의 새로운 전기

그 무렵 한 연극기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러나 1년만에 이혼을 했다. 갈등의 단초는 “당신(심씨)은 왜 굳이 그렇게 어렵게만 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혼 이후 1년이상을 헤맸다. 경기 원당 깊숙히 틀어박혀 세상과의 출입을 끊고 살았다. 유일하게 얼굴을 보는 사람이라곤 매일 찾아오는 두부장수. 너무도 죽고싶다는 유혹때문에 한여름에도 방안에 난로를 지피고 있어 보기도 했다.

행여 땀이라도 흘리면 살고싶은 의욕이라도 생길까 해서였다. “이혼문제보다도 삶 자체, 인생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욕심은 많고 현실은 너무나 힘겹고. 이런 사회에서는 차라리 서른살 전에 죽어버리는 편이 편하다고 생각했지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때때로 죽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생각을 떨치려고 무척 애씁니다. 요즘도 저는 제 자신이 시궁창에 있다고 말합니다. 시궁창에서 보는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거든요. 그 이상 더러운 곳도, 바닥도 없으니까. 그러니 오히려 희망이 보인다는 겁니다. 난 시궁창에도 있었던 놈인데 뭔들 두려워. 난 어디든지 뛰어나갈수 있어. 항상 그렇게 제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겁니다”

그렇듯 지쳐있던 심씨에게 10년전 공연한 ‘개’는 여러 모로 좋은 기회를 열어주었다. 공연에 반한 일본의 한 디렉터가 심씨를 초청, 일본 공연길이 트이면서 그는 더 넓은 세상과 자신의 할 일을 보았다. 최근에도 ‘한일 아트페스티벌’ 등을 마련하는 등 지금까지 십년 이상 일본 예술계와 교류를 이어온 심씨.

점차 국내에서도 이름이 알려지면서 한때 돈을 대겠다는 제작자도 만난 적이 있다. 제작비 투자 5천만원. 그러나 결과는 또 참패였다. 원래는 대사가 없던 것을 기존 연극처럼 대사화한 것이 화근이었다. 제작자는 2천만원을 날리고 출연자는 빈털털이로 손을 털었다. 뭐든 ‘하던 짓’을 바꾸면 뒷 탈이 생기는 것일까.

1993년 발표작 ‘햄릿머신’으로 석달만에 억대 공연수익을 올렸던 대히트 기록을 빼고는 쓰라린 흥행실패의 경험이 많다. 공연중 핸드폰을 받거나 술을 마셔도 좋다고 과감히 개방해준 작품 ‘노이즈’도 실패. 아직도 대다수 한국인은 점잖아야 공연이라고 생각하는 ‘표준규격형’ 관객이 대부분임을 다시금 아프게 확인했을 뿐이다.


야심작 첨단형 퍼포먼스 ‘화성인’올가을 선보여

특히 작년 세계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둔 퍼포먼스 ‘난타’의 히트 소식은 그의 뒷통수를 ‘난타’했다. 명색이 20여년을 지켜온 이 분야의 젊은 터주로서 진작에 그 자신이 터뜨렸어야 할 일을 먼저 선수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왜 좀더 민첩하게 준비하지 못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후 1년이나 벼른끝에 올 가을 비장한 야심작을 선보인다. 가제는 ‘화성인’. 거의 무대환경 전체가 바뀌는 첨단형 퍼포먼스다. 느닷없이 객석의 의자가 움직이는가 하면 뭔가 관객 위를 휙 지나가기도 하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상한 소리도 튀어나온다.

또 뭔가를 던지면 순식간에 객석에서 비닐이 펼쳐지면서 그림으로 변하는 등 무대장치 비용에만 최소한 4천여만원이 들어가는 '값비싼 실험작’이다. “이달에 있을 햄릿머신 공연을 마치고 나면 올 가을엔 정말 치열한 싸움을 벌여볼 겁니다. 이번에도 안되면 그냥 이 극장 문 닫아버릴 겁니다. 그 정도로 독한 각오로 준비하는 겁니다”

또 한가지 그의 꿈은 영화배우로 뜨는 것. 최근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욕쟁이 형사 독사로 30여 장면에서 얼굴을 내밀었고, ‘구멍’에서도 실연당해 자살하는 남자역을 맡아 멋지게 몸을 던졌다. 개인적으로 심씨와 절친한 ‘인정사정…’의 이명세 감독이 언젠가 그에게 들려준 말이 있다. “어쨌거나 될 놈은 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만한 진리는 없다. 심씨의 생각이 꼭 그렇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겸명원.사진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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