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현저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자.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상당기간을 ‘수요가 공급을 엄청나게 초과하는 시대’에 살았다. 어떤 물건이든 만들어 내놓기만 하면 팔려나갔다.

품질도 따질 필요가 없고 오직 만들거나 아니면 밀수를 해서라도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됐다. 워낙 배고프던 시절이라 디자인이나 국제 경쟁력 등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기업을 하는 일도 비교적 간단했다. 너무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은행대출 또는 외국 차관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그 돈으로 무엇이든 만들어서 팔면 되는 일이다. 임금은 낮은데다 매년 인플레는 뒤따르고 부동산 가격마저 뛰었다. 수요와 공급이 현저한 불균형을 이루는 속에 재벌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늘어난 공급이 드디어 수요를 초과하는 일이 생겼다. 이제는 무턱대고 만들기만 해서는 큰일나는 때가 된 것이다. 앞뒤 안가리고 팽창만을 거듭해온 기업은 경쟁력을 잃게 되고 급기야 빚더미에 올랐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에도 불구하고 몇몇 재벌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다. 최근 들어 불어닥친 벤처의 바람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흔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위력을 보이고 있다.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새롬기술의 주식을 모두 팔면 한진, 쌍용, 한화 등 3개 재벌 그룹을 몽땅 사고도 돈이 남는다.

또 우리나라 제1의 갑부인 삼성 그룹의 이건희 회장 다음에는 아직 불혹(不惑)의 나이도 안된 벤처기업 로커스의 김형순 사장이다.

정치도 경제와 같은 사회현상의 하나다. 또한 정치와 경제는 손바닥의 안팎과 같이 어느 하나를 보면 다른 하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다소의 시간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는 우리 경제가 걸어온 길을 뒤따라가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수요와 공급이 현저한 불균형을 이루어왔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오직 정당에서 내놓은 ‘물품’외에는 유권자의 선택이 불가능했다. 권력자들은 제각기 정당을 만들고 자신의 이해와 기준에 따라 ‘공천’(公薦)이라는 미명 아래 국회의원 후보를 ‘시장’에 내놓았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므로 유권자들은 어느 후보에게 표를 던져도 결국 ‘정치의 공급독점’이 빚어지는 상황에서 ‘정치의 품질’은 조금도 나아질 수 없었다. ‘영남지역에서는 어느 정당이, 호남지역에서는 어느 정당이’하는 식으로 거의 완전에 가까운 ‘공급독점’이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대통령, 김종필 전총리 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벌총수’들이다. 물론 과거 총칼을 들고 특정한 물품을 강매했던 전두환 전대통령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민주적 논의와 절차는 없고 오직 ‘총수’들의 의사에 따라 일이 정해졌다.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가 됐고 정 안되면 ‘임원’들만 갈아치우면 됐다.

그러나 이제 정치에 있어서도 조금씩이나마 환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이 “이런 물건은 마음에 들지않으니 다른 것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아라”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나아가 “물건을 바꿔놓지 않는다면 불매운동도 벌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바야흐로 정치적 공급이 정치적 수요를 초과하는 때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의 재벌구조’를 부수는 것이다. 이회창 총재마저 ‘재벌총수’를 닮아가고 있는 상황 아래서 ‘새로운 물건’을 내놓으라고 외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몇몇 ‘재벌’이 지배하고 있는 ‘공급독점’의 구조를 깨지않는 한 그 물건이 그 물건이고 정치발전은 요원하다.

결국은 정치에서도 ‘벤처’가 탄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있어서도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필요하다. 우리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을 ‘정치 벤처’에 관해 다음 호에서 좀더 생각해보자.

신재민 주간한국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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