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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신드롬] 테헤란 밸리의 낮과 밤

꿈과 향략이 뒤엉킨 '욕망의 계곡'

2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 벤처기업인 ㈜코스메틱랜드의 연구실. 밤 늦은 시각인데도 절반 가까운 직원이 자리를 지키며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일부는 책상 위에 엎드려 새우잠을 자거나 아예 의자 위에 두 발을 뻗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회의실에는 벌써 3시간째 간부들의 열띤 전략 회의가 진행중이다. 회의실 문 앞에는 저녁 식사때 배달됐던 빈 도시락과 커피잔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1시간 후 회의를 마치고 나온 이 회사 CEO 최선호(36)사장은 사무실 내에서 유일하게 양말을 벗은 채 일하고 있는 한 여자 직원에게 다가갔다. “선아씨,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혼날줄 알아”라고 퇴근을 종용했다. 연구팀원인 김선아(27)씨는 현재 임신 6개월인 임산부.

본래 일 욕심이 많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도 늘상 밤늦게까지 일을 해 최사장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최사장의 퇴근 지시에도 아랑곳 않고 김씨는 열심히 마우스를 긁어대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으면서 이 회사 커피 자판기를 찾는 직원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벤처 회사의 밤은 깊어만 갔다.


불밝힌 사무실과 타락의 밤 공존

거의 유사한 시각, 근처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골목길.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는 모 고급 유흥업소 입구 앞에는 20대 중반의 청년 2~3명과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한 미모의 여성 2명이 연신 몰려오는 손님을 맞이하기에 바쁘다.

손님 대부분이 말쑥한 신사복 차림의 30대 초반 남성. 오후 10시가 넘자 7~8명의 단체 손님은 자리가 없는지 들어갔다 곧바로 나와 옆 가게로 들어갔다. 밤 12시45분. 내부에 있는 손님이 하나둘씩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손님중 절반 가량은 20대 초반의 여성과 팔장을 낀 채 바로 옆에 있는 A모텔로 향했다. 새벽 2시가 되자 이 클럽 앞은 잔뜩 취해 있는 손님과 배웅 나온 여성, 클럽 관계자, 대리 운전기사로 웅성거렸다.

늦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부는 도심의 한복판, 모두가 잠든 이 한밤에도 유흥업소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이런 흥청망청한 ‘향락 파티’가 벌어지는 바로 옆 건물에 있는 벤처기업 사무실은 아직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젊음의 열정과 방탕,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욕망에 굴복한 타락이 공존하는 곳. 바로 이것이 서로 다른 두 얼굴을 지닌 ‘테헤란 벤처 밸리’의 참모습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역에서 삼성동의 삼성역에 이르는 ‘테헤란 벤처 밸리’는 이 시대의 ‘꿈’과 ‘희망’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

2년 전부터 벤처 기업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첨단 벤처 기업의 메카로 자리잡은 이곳은 이제 젊은이에게 꿈을 실현하고 부를 축적하는 ‘기회의 땅’이 되어 버렸다. 1980년대 여의도가 금융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듯 이제 테헤란 벤처 밸리는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의 빌게이츠를 꿈꾸는 사람들

이곳에는 사람과 정보, 그리고 돈이 몰리고 있다. 현재 약 2,000개에 가까운 각종 벤처 기업과 증권 은행 벤처캐피털사, 창투사 등 금융권이 이 주변에 포진해 있다. 최근에는 대기업 등이 이제 막 출발하는 신생 벤처기업을 태생 초기부터 키워주는 벤처 인큐베이터 센터를 잇달아 개설해 벤처기업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빌 게이츠’를 꿈꾸는 벤처 창업가들이 몰려들면서 이곳 테헤란 벤처 밸리에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코스닥이나 인터넷 공모를 통해 수십억원대의 자본을 모은 벤처 기업이 생겨나면서 이 자금을 겨냥한 금융기관이 속속 벤처 밸리로 모여들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창투사와 사이버 증권사까지 대거 몰려들어 테헤란로 일대는 이제 여의도에 버금가는 금융 중심지로 바뀌어가고 있다.

벤처 기업의 대규모 유입으로 인근 사무실 임대료가 폭등, 전국에서 가장 비싼 곳이 돼 버렸다. 지난달 선릉역 부근에 지점을 개설한 E-미래에셋 증권의 경우 임대료로 평당 1,000만원을 주고도 어렵게 계약했다.

이 지역의 부동산 관계자는 “현재 큰 길가에 있는 1층 사무실의 경우 평당 1,300만원을 주고도 구하기가 어렵다. 올초부터는 이면도로에 위치한 사무실도 평균 50% 가량 임대가가 올라 갔다”고 말했다.

음식 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다. 예전만 해도 이 주변은 고급 한식집이나 일식집 일색이었다. 그런데 최근 벤처 기업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대거 늘면서 도시락이나 피자 배달 전문점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가격도 도시락이 3,500원, 피자도 1만원 수준으로 저렴한 편.

또 택시들이 손님이 없는 새벽시간이면 늦게 퇴근하는 벤처회사 직원을 태우기 위해 이곳 테헤란로 쪽으로 몰려든다. 그래서 새벽 2~3시가 되면 인터콘티넨탈 호텔 앞에서 선릉역에 이르는 1.5㎞ 남짓한 구간은 빈택시로 장사진을 이룬다.


‘황금의 땅’인식, 고급유흥업소 몰려

‘돈’과 ‘기회’가 있는 만큼 타락의 징후도 많다. 상당수 벤처 기업가들이 젊음을 불사르며 일하고 있는 반면 일부 성공한 벤처리스트들은 벌써부터 주체하지 못하는 엄청난 부를 가지고 타락의 길에 빠져들고 있다.

테헤란 벤처 밸리가 ‘황금의 땅’으로 인식되면서 지난해부터 이곳에는 룸싸롱, 단란주점, 나이트클럽과 같은 고급 술집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젊은 벤처기업가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단란주점이나 룸비지니스, 비지니스 클럽 같은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한다. 업소 이름도 대부분 ‘인터넷 룸 비지니스’‘넷 카페’처럼 벤처 사업가의 구미에 맞게 정한다.

수차례 불법 영업으로 정지 명령을 받았던 D클럽의 경우, 메인 홀외에도 45개의 룸과 무희를 포함해 150여명에 달하는 여종업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 클럽의 술값은 거의 룸싸롱 수준이지만 주말에는 룸이 없어 손님이 돌아가기 일쑤다.

그래서 주변에는 무려 3개의 단란주점이 잇달아 생겨났다. 이 클럽의 한 종업원은 “우리 업소에 오는 손님 대부분은 30대 초·중반의 벤처기업가들과 이들이 로비를 하는 창투사나 벤처캐피탈사 직원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최고급 양주에 아가씨 팁도 정해진 것보다 2배 이상 주는 등 마치 재벌 2세처럼 행세한다”고 귀뜸했다.

인근의 한 단란주점 마담은 “지난해 말부터 테헤란로 일대 유흥업소는 벤처 사업가 덕택에 IMF 이전에 버금가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며 “최근에 잘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오려는 업주들이 몰려 가게 임대료가 엄청나게 올랐다”고 말했다.

테헤란 벤처 밸리는 이제 우리 경제의 심장부가 됐다. 일부의 일탈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살아숨쉬는 한국 경제의 활력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제 막 불붙은 열기가 일부 한탕주의자에 의해 매도되지 않도록 정부 당국의 지원과 관심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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