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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손' 선거 브로커

선거의 독버섯, 온갖 회유.협박에 출마포기

서울 강북 모지역구의 야당 후보인 C씨는 공천 발표 직후 집과 사무실의 전화, 그리고 본인 및 가족, 핵심 참모의 휴대폰 전화를 모두 바꿔버렸다.

그리고 일대일로 하던 대인 면담도 보좌관을 거치도록 계선화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루 10여통씩 걸려오는 선거 브로커의 전화와 면담 요청을 1차로 걸러내겠다는 의도다. 지난달 말 C후보가 공천자로 확정된 이후 사무실과 집에는 자원봉사를 자처한 사람의 방문과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가 돈이나 지구당의 직책을 요구하는 선거꾼이다. C후보는 잘못하다간 선거도 치르기전 선관위에 고발될 것이 두려워 가급적 이들과의 대면을 피하고 있다. 후보자가 지지자의 면담 요청을 피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 그러나 그런 일이 지금 각 지구당에서 벌어지고 있다.

C후보에게 선거꾼이 몰려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곳은 15대 총선과 지난 대선때 여야가 박빙의 대결을 펼쳤던 접전지. 더구나 C후보는 15대때 서울의 다른 지역구에서 출마했기 때문에 이 지역구에는 별 연고가 없다. 반면 상대방인 여당 후보는 3선에 도전하는 현역의원. 이런 C후보의 약점을 간파한 선거꾼이 온갖 미끼와 회유을 일삼으며 그에게 추파와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표미끼로 돈요구‘비일비재’

16대 총선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면서 선거 브로커로 인한 폐해가 벌써부터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선거꾼’이라고 불리는 이들 선거 브로커는 선거때만 되면 생겨났다 사라지는 불나방. 이들은 주로 ○○향우회, ○○동창회, ○○문중회, ○○부녀회, ○○조기축구회, ○○친목회, ○○산악회, ○○노인회 등과 같이 비공식적 직능 단체를 빌미로 거액의 돈과 반대 급부를 뜯어낸다.

최근에는 ○○연합, ○○단체 등과 같이 시민단체를 흉내낸 사조직까지 생겨나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돈을 주지 않을 경우 ‘상대 후보를 지원하겠다’하는 고전적인 방법에서 ‘개인 비리를 폭로하겠다’, ‘불법 행위를 선관위에 고발하겠다’는 식의 협박도 서슴치 않는다.

지난달 한나라당 노원갑에 공천을 받은 윤방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가 선거 브로커의 돈 요구와 협박에 못이겨 6일만에 출마를 포기했다. 서울 강남을에 나설 예정이었던 민주당 서상록 전삼미그룹부회장도 공천 내정 소문이 나돌자 10여명의 선거꾼이 몰려와 ‘수천 표를 몰아주겠다’며 거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역시 총선을 포기했다.

또 자민련이 수원 권선에 공천권을 준 허문도 전통일원장관도 “지역구 부녀자들이 벌써 출마 예상 후보의 지원으로 선심관광을 다녀오는 등 ‘돈 선거’에 환멸을 느꼈다”며 출마 의사를 접었다.

선거 브로커의 주요 표적이 되는 곳은 정치 신인이 나서는 지구당이나 전지구당 위원장이 공천에서 탈락해 새 위원장이 취임한 지역구가 1차 대상이 된다. 현역이나 2선 이상 의원의 경우 지명도나 조직력에 뛰어나 이들이 들어갈 여지가 비교적 좁다. 하지만 정치 신인같이 경험이 부족한 후보는 동창회나 향우회 대표라 명함을 내밀며 ‘수백 표를 몰아주겠다’고 하는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다.

또 연고가 전혀 없는 지역구 출마 후보자나, 사고 지구당처럼 조직 기반이 취약한 곳에 출마하는 후보자들도 과장인줄 알면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정치신인, 지구당 새위원장등이 표적

가장 일반적인 경우가 공식적인 직함 요구형. 주로 자신은 선거대책 위원장이나 부위원장 등의 직함을 받고 휘하에 있는 10여명의 중간 조직원을 문화, 종교, 청년부 같은 직능별 부장이나 각 동별 담당책으로 심어 놓는다.

이들은 공식적인 활동비 외에 관광, 음식 접대, 경조사비 등과 같은 비공식 선거 운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수백만원의 활동비를 청구한다. 후보와 지역, 여야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보통 총책은 500만원, 직능 부장급은 200만~300만원의 비공식 선수금을 받는다.

그리고 동창회나 단체 관광 같은 모임을 주관할 때마다 최소 100만원에서 500만원의 추가 활동비를 요구한다. 15명의 조직원을 둔 브로커 총책의 경우 후보로부터 약 1억~3억원 내외의 돈을 뜯어낸다.

선거일 2~3일전에 소위 말하는 후보자들이 뿌리는 ‘마지막 실탄’을 노리는 선거꾼도 있다. 보통 박빙의 경합이 벌어지는 지역구에 해당되는데 ‘부동표 1표가 상대방으로 넘어가면 2표를 잃게 된다’는 식의 협박성 카드를 내놓으며 현금을 요구하는 케이스다. 한 표를 끌어주는데 10만원씩 계산해서 보통 2,000만~3,000만원을 요구한다.

지난 15대 총선에서 서울 모 지역구에 출마한 현역의원의 경우 이런 마지막 실탄 비용만 10억원 이상을 쏟아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부 브로커들은 당선후 지방의회나 자치단체장 공천이라는 반대 급부를 요구하거나 지역내 이권 사업을 얻어내려고 경우도 많다.

14, 15대 총선에서 선거 브로커로 일했던 K모(36)씨는 “선거꾼들은 보통 자영업자나 실업자, 전직 지구당 간부들이 대부분인데 평상시에는 친목회, 동창회, 향우회, 조기축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해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가 철만 되면 후보들에게 달라붙어 돈을 뜯어낸다”며 “특히 선거 경험이 없거나 지구당 조직력이 떨어지는 후보, 그리고 무소속 후보들이 이들의 유혹에 쉽게 걸려드는데 준 돈의 50%는 선거꾼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고 폭로했다.

이런 주먹구구식 선거 브로커가 난립하자 최근에는 홍보에서 조직관리에까지 일괄적으로 맡아주는 선거 기획사도 생겨나고 있다. 국내에 약 1,000개가 있으나 이중 꾸준히 일을 하는 곳은 전체의 5%도 안된다. 선거 기획, 홍보 인쇄물 디자인, 여론조사, 조직 관리 등의 포함해 한 후보당 대략 2억원 정도의 기획료를 받는다.


잘못된 선거제도가 선거꾼 기승 부추겨

선거철만 되면 이런 선거꾼이 생겨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선거제도 탓이 가장 크다. 선거꾼들의 표적이 되는 원외 지구당위원장 후보들은 사실상 여러 면에서 현역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 우선 현역 후보들은 의정보고대회나 의정보고서를 통해 유권자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또 후원금도 현역의 경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당하게 모을 수 있는 반면 원외에 있는 후보들은 소속 지구당 후원회 명목으로만 후원금을 모아야 한다.

여기에 현역의원은 지역구의 동수당 3명씩 정해진 선거운동원외에 보좌관을 포함한 참모진이 모두 공식적인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원외 후보의 경우 이렇게 불리한 조건을 만회하기 위해 다소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선거꾼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기부행위를 요구하거나 유도하는 자에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앙선관위는 벌써부터 이상 조짐이 발생하자 지난달말 선거 브로커에 대한 강력한 제재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경찰청도 본청과 14개 지방청, 전국 229개 경찰서에 ‘선거사범처리상황실’을 설치, 2,165명으로 구성된 선거사범 전담반을 편성해 단속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 당국의 강력한 단속 의지에도 불구하고 매번 선거때면 선거 브로커로 인한 불법, 탈법 행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선관위에 적발된 불법 선거운동 건수가 15대 총선의 같은 기간보다 10배나 늘어난 634건에 달했다. 새해 들어서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정 선거의 악성 종양과 같은 선거브로커들을 없앨 수 있는 근본적인 치유책은 유권자의 인식 전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유권자들이 깨끗한 한 표를 행사한다면 후보에게 기생하는 선거 브로커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이라 하듯 선거 브로커라는 독버섯은 바로 유권자의 ‘부정한 마음’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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