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되게, 더 젊게 "바꿔"

‘두 번이나 황제가 된 사람’

황제가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던 전제주의 시대에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황제가 자리를 지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명나라 황제의 계보를 훑어보면 놀랍게도 생애에 두 번이나 제위에 오른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영종(英宗)이다. 영종은 명나라의 6번째 황제이자 동시에 8대 황제이다.

영종은 서기 1449년 중국 북방을 침략한 오이라트의 에센(也先)을 토벌하러 원정에 나섰으나 하북성의 토목보(土木堡)라는 요새에서 대패, 오히려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토목(土木)의 변(變)’이라고 부른다.

에센은 영종을 미끼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영종의 동생을 새 황제인 대종(代宗)으로 옹립한다. 화가 난 에센은 영종을 아무런 조건없이 명으로 돌려보내는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전·현직의 두 황제가 권력다툼을 벌인 끝에 영종이 동생을 몰아내고 1457년 또다시 제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번째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 영종이 ‘6대 황제’시절의 ‘정통(正統)’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8대 황제’때는 ‘천순(天順)’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결국 영종은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잊기 위해 이름을 바꾼 셈이다.


회사이름·브랜드 교체바람

그런데 54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재계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즉,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막론하고 수십년간 사용해온 회사 이름과 브랜드를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다. 증권거래소와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주식시장과 코스닥에서 거래되는 기업중 20여개 이상이 이름을 바꾼데 이어 올해에도 약 50여개 회사가 사명을 변경하거나 변경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름을 바꾸려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 이름이 나쁘면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래되고, 투박하고, 거친 이미지의 이름으로는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경험칙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제일모직은 반도체 소자 보호용 소재인 EMC 등 정보통신 소재부문에서 연간 100억원 이상의 순익을 내는데도 회사 이름에서 풍기는 ‘사양산업(섬유, 패션기업)’의 이미지 때문에 주가가 바닥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한때 1만5,000원까지 육박했던 제일모직의 주가는 ‘제일모직은 섬유회사’라는 투자자의 편견 때문에 삼성그룹 차원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 7,000원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일모직을 거꾸로 따라 배운 것일까. 한진그룹은 지난 3월1일 계열 증권회사인 한진투자증권의 이름을 ‘메리츠(Meritz) 증권’으로 갈아버렸다.

한진그룹은 “프루덴셜 파마와의 자본제휴를 계기로 ‘우수함’과 ‘공적’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인 메리트(Merit)를 사용, 첨단 이미지의 브랜드를 채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한진증권은 대한항공의 비행기가 떨어질 때마다 이미지 실추로 고민했는데 이제는 그 부담을 완전히 덜게 됐다”고 말했다.

이밖에 3월 주총에서 개명 예정인 대부분의 회사들이 ‘-텔’,‘-콤’,‘-컴’,‘-통신’, 또는 ‘벤처’가 들어가는 이름이나 영문으로 개명을 검토중인 것도 최근 불어닥친 인터넷·벤처 열풍에 따른 이미지 개선작업인 셈이다.


청소년·어린이 타깃

기업의 개명 열풍과 함께 이미지와 감성을 중시하는 청소년과 어린이를 끌어들이기 위한 기업의 ‘뉴 브랜드’전략과 ‘캐릭터 마케팅’도 새로운 추세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SK텔레콤이 내놓은 ‘스무살의 011-TTL’이라는 알듯 모를듯한 광고카피는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SK텔레콤에 따르면 1999년 중반 이 회사의 전체 시장점유율은 40%를 넘었으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점유율은 20% 이하였다. 기존 ‘스피드 011’의 브랜드가 ‘어른들의 이동전화’라는 이미지로 고착됐기 때문이다.

10대 및 20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새로운 브랜드가 등장했다. 바로 ‘TTL’이었다. ‘TTL’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설명이 없었다.

‘20대의 생활(The Twenties Life)’이나 ‘사랑할 시간(Time To Love)’등 개성 강한 젊은이들이 자기 멋대로 뜻을 연상할 수 있도록 굳이 브랜드의 정확한 뜻을 정하지 않았다. TV 광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소녀가 등장, 기존의 ‘스피드 011’과는 완전히 이미지를 구축했다.

성과는 금방 나타났다. 1999년 7월15일 브랜드 출시이후 4개월만에 85만명이‘TTL’에 가입했다. 불과 4개월전 20% 미만이던 18~23세의 이동전화 신규가입 시장에서 50%의 점유율을 차지한 것이다. SK텔레콤 박창돈 대리는 “TTL브랜드는 할아버지를 소녀로 바꾸는 이미지 작업이었다”며 “2000년 3월8일 현재 가입 고객은 135만명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캐릭터 사용, 매출 급성장

‘요즘은 기업이 이미지를 파는 시대’라는 점을 또다르게 실감할 수 있는 곳은 1999년 이후 급팽창한 국내 캐릭터시장이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1998년 6,000억원대에 불과했던 캐릭터시장의 규모는 꼬꼬마 텔레토비, 포켓몬스터 등 인기 만화의 주인공을 응용한 캐릭터가 붐을 이루면서 1999년에는 1조2,000억원대로 두배 이상 증가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꼬꼬마 텔레토비는 롯데제과 등 40여개 업체가, 포켓몬스터는 대상, 롯데제과 등 50여개 업체가 매출액의 2~5%에 해당하는 거액의 로열티를 내고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업체들이 거액의 로열티를 내고 캐릭터를 사용하는 이유는 캐릭터에 투자한 만큼 돈을 벌기 때문이다. 실제로 롯데제과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기존 빨아먹는 형태의 ‘텔레토비 주물러’를 출시했는데 성수기인 7월에는 이전 매출액의 두배가 넘는 7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롯데제과는 꼬꼬마 텔레토비, 포켓몬스터와 함께 최근에는 헬로 키티, 둘리, 날아라 수퍼보드 등 국내외 유명 캐릭터를 이용한 제품을 추가로 내놓은 상태이다.

꼬꼬마 텔레토비의 국내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안데르센의 권준형 팀장은 “캐릭터 열풍이 불면서 E마트 등 주요 유통업체들이 제과, 신발 등 아동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에게 반드시 캐릭터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병원, 지자체 등도 앞다퉈 자체 캐릭터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회사 이름, 브랜드, 제품 등 모든 측면에서 이미지 구축에 실패한 기업은 생존이 위협받는 시대인 것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