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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강학준 한국가정경영연구소장

3년 전의 판단, 전혀 후회없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너무 행복하고 기쁘며 내 일정도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게 만드냐구요? 이젠 내 삶을 내 스스로 연출할 수 있다는 것, 모든 완급을 직접 조절하고 내 인생을 내 손으로 감독할 수 있다는 것.

올해로 내 나이 마흔 셋. 1997년 12월31일자로 (주)대교 대표이사직을 스스로 물러나 이젠 한국가정경영연구소 소장 강학중이 돼 있습니다. 내겐 갑작스런 결심도 아니었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해 온 일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엔 만류와 반대가 심했습니다. 특히 회장으로 계신 큰 형님이나 어머니의 반대는 말할 것도 없고 주위에선 ‘남들은 명퇴도 겁이 나 몸을 사리는 판에 한참 배부른 사람’이라고도 했고, 혹시 그만두는 이유가 표면적인 사의와는 다른 뭔가 숨어있지 않은가, 혹시 큰 형님과 남 모르는 불화라도 있는게 아닌가, 엉뚱한 오해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나는 정말 가정이 소중했고 비록 연봉 1억 가까운 소득과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와 비서, 제법 잘 나가는 회사 사장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갖가지 혜택이 있었지만 그만큼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애정을 갖게 했던 곳이기에 더더욱 회사를 위해 과감히 물러나기로 한 것입니다.

일 자체로만 보면 원래부터 여학교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던 내 적성엔 그만큼 잘 맞는 직장도 없었지만 바빠진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일에 끄달려간다는 느낌이 들더라는 겁니다. 또 내가 단지 회장의 동생이라는 특수한 관계때문에 오로지 능력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이젠 내가 원하던 일을 찾아 특수한 관계가 아닌 객관적인 인정을 받고싶다는 생각. 그런 것들이 결심을 재촉한겁니다.

사직 의향을 밝힌 뒤 내 뜻을 관철시킬 때까지 약 1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12월31일자로 온전한 가장으로 돌아온 뒤 더이상 “저녁 먹을 때마다 행여 건너편 아파트에서 보고 아빠없는 집이라고 생각할까봐 블라인드을 쳐놓았다”는 아내의 얘기나 “아빠와 밥 한번 같이 먹어보는게 소원”이라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보름간의 가족여행서 진한 가족애 느껴

퇴사 직후 곧바로 시작한 가족 도보여행. 이젠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더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자리였습니다.

여행은 아이들에게 특히 힘들고 고생스러웠을겁니다. 서울에서 출발해 양수리, 평창, 정선 등을 거쳐 강원도 동해역까지 이르는데 꼬박 14박15일이 걸렸습니다. 하루 평균 20km로 해 약 280km를 걷기만 했습니다.

유명 관광지, 값비싼 숙소는 처음부터 제외했고 밥값도 초절약, 숙소도 여인숙과 민박으로 해결하는 고된 여행이었습니다. 더구나 출발 3일째 내가 양평에서 발목을 삐고는 내내 다리를 절자 애비인 내가 힘들까봐 아이들이 저 몰래 제 배낭에서 짐을 덜어내 자기들의 가방에 옮긴걸 뒤늦게 알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참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추억 이상의 의미가 담긴 여행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려움도 없었던건 아닙니다. 참으로 사소하긴 하지만 이런 것들입니다. 그전엔 늘 운전기사가 따라다니며 챙겨주던 제 가방이며 외투, 우산 등을 그 어느 날부턴가 직접 들고다녀야 하게 됐을 때, 일을 마친 뒤에도 다른 사람들은 금새 대기하던 운전기사가 달려와 차로 모셔가는데 저는 혼자서 차를 타러 걸어가야 될 때, 집에서도 한동안 출근을 하지 않을 때마다 혹시 아파트 경비원이 나를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공연히 의식이 될 때 등. 확실히 내가 더이상 사장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아주 잠깐에 걸쳐 겪은 사소한 통과의례에 불과하지만요.


한번만 뒤집어 생각하면 만사가 편한법

그외엔 별 문제 없었습니다. 원래 내 성격이 느긋하기도 합니다. 매사 신중한 편인데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를 내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똑같은 고생이라도 남들이 5만큼 짜증을 낼 일을 나는 5 이하로 떨어뜨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쉽습니다. 한번만 뒤집어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거냐구요? 가령 차를 몰고가는데 심한 교통체증 때문에 길이 막혀 약속시간에 늦게 됐다고 치죠. 그럴 때 나는 빨리 시간에 대한 집착을 포기합니다.

어차피 길이 막힌거 혼자 안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럼 아예 30분이나 1시간쯤 늦는 수밖에 없다고 일찌감치 생각을 바꿉니다. 핸드폰으로 미리 연락을 해줄 수 있으면 더 좋고, 이 기회에 마침 내가 좋아하는 조영남 노래도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생겼으니 얼마나 좋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거죠. 스트레스를 받은 뒤에 풀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가능한 한 안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는 미리 피해가자는 겁니다. 가끔은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당신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냐”고도 하지만 물론 그건 아니구요.

부모님과 고향 생각을 하면 참 애틋합니다. 내 고향은 경남 진주. 초등학교 4년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부모님은 고향에서 식당을 운영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초등학교밖에 나오시지 않았지만 우리 4남매의 교육에 평생을 거셨던 분입니다.

그중에서도 당신이 내게 주신 가장 값진 재산은 ‘자존감’이란 걸 가르쳐주셨다는 겁니다. 나는 막내였지만 늘 4분의1만큼 혹은 그 이상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라도 우리 집은 늘 화목했고, 부모님은 늘 내게 “너는 할 수 있어. 넌 참 가치있는 녀석이야. 다만 늦되는 것 뿐이야”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실제로도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학생회장을 할 만큼 부모님의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도 않았지만요.


주위 기대 부담, 머리깍고 산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고2때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와 함께 학교와 진로문제까지 겹쳐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남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긴 처음이지만 고2때 스님이 되겠다고 두 번이나 가출, 입산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생각으론 스님이 되겠다는 목적때문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아니라 소위 일류대 진학에 대한 주위의 기대로부터 무작정 도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어머님이 가장 놀라셨을 겁니다. 특히나 평소엔 말썽 한번 안부리던 얌전한 아들이 어느 날 간다온다 말 한마디없이 사라져버렸으니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처음엔 해인사로 들어가 밥짓고 나무하고 큰 스님 수발드는 행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이를 닦다말고 수소문 끝에 찾아온 어머니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또 집을 뛰쳐나와 화암사로 갔다가 ‘밥 하는 밥중은 아무나 될 수 있어도 성직자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란 걸 깨닫고 그땐 내 발로 돌아왔습니다.

한때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리시느라 하숙을 치시기도 했고, 그래도 언젠가 돈이 없어 학비를 못 낸 기억도 있습니다. 형님의 학습지 사업도 맨손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대학입시에 실패한 뒤 계속 방황하자 형님은 차라리 자기 회사에서 같이 일할 것을 제의했고 그 진짜 속내엔 못내 불안하게 떠도는 동생을 곁에서 붙들어주고 싶어한 것임을 나는 압니다. 다행히 그 일은 내 적성에 잘 맞았고 1976년 창업이후 20여년간 그 한 자리를 지켜오기까지 저는 너무도 즐겁게 일했습니다.


“일의 성취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영국과 핀란드로 유학을 다녀오고 대표이사로까지 승진하면서도 내내 든 생각은 ‘일의 성취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경영자로 있을 때도 나를 두고 ‘이상론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성장을 외치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먼저 봐야한다’고 좀더 천천히, 그러나 차근차근 다져가며 가기를 원했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적정이윤이지, 다다익선이 최고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는 다분히 현실적이고 성취지향적 타입의 경영자였다기보다는 그저 관리자였다고 나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일면 내 자신의 균형을 되찾는 작업입니다.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도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조금만 내 결심이 늦었더라도 가족 속의 내 자리는 훨씬 더 좁아져 지금보다 더 비집고 들어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미 옛날부터 “보통 이상의 점수는 된다”고 아내가 인정한 나였지만, 나 역시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하물며 일 때문에 가정을 거의 잊다시피 살아가는 다른 남편들, 아버지들은 어떻겠습니까.

내친 김에 이야기하자면 요즘 우리 가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중 하나는 너무 부모와 자식 위주의 생활로 치우쳐간다는 겁니다. 가정은 부부관계가 출발점이자 핵입니다. 좋은 부부관계없이 좋은 가정이 이뤄질 수 없는거죠. 부부의 문제란 것도 사실은 답이 아주 뻔한 겁니다. 그 어느쪽도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것 뿐임을 인정하고 나면 이미 갈등의 반은 덜어낸 겁니다.

싸우는 이유도 얼마나 사소합니까. 양말 뒤집어 벗어놓는 것부터 치약을 아무데서나 꾹꾹 짜는 것 등등. 하지만 그런 작은 일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한 부부관계가 금이 간다거나 하루종일 기분이 나빠있을 바에야 차라리 좀 덜 깨끗하고 덜 부지런하면 어떻습니까. 치약? 그렇게 눈에 거슬리면 아예 두 개를 사버리는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대로 밑에서부터 깨끗이 짜올려가며 쓰고, 나는 내 맘대로 꾹꾹 짜서 쓰고. 서로를 고치려고만 들지말고 어느 선에선 자유로이 인정해주자는 겁니다. 따져보면 분명히 방법이 있습니다. 단지 이것 아니면 저것 하는 식으로 답답할 정도로 매사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니까 문제죠. 부부의 금이 갈만큼 가치있는 싸움이란 알고보면 별로 없습니다.


매사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것이 갈등의 원인

앞으로 우리 연구소가 집중하고자 하는 문제도 바로 부부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아직 우리 연구소는 뼈대뿐입니다. 간판은 걸었지만 최소한 향후 3년 동안엔 기초공사를 튼튼히 다지는 일이 주가 될 겁니다.

당장 확실한 마스터플랜을 내놓을 순 없지만 대략 오는 7월부터 사이버 상담(www.home21.co.kr)을 위주로 활동을 펼 생각입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절대 급하게 서둘지 않고 기초부터 하나하나 공들여 다질겁니다. 이 때문에 최소한 3년 이상은 아무런 수입없이 지출만으로 견딜 각오이고 준비도 돼 있습니다.

또 상황이 바뀐만큼 생활의 씀씀이 모양도 그에 맞추면 별 문제 없습니다. 이미 아파트도 46평짜리에서 33평으로 옮기는 등 살림규모도 줄였고 내가 요즘 경희대학교에서 가족학 박사과정 1학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런 학교생활도 못지않게 도움이 됩니다. 교통도 전철을 이용하고 밥값은 교수식당 2천5백원, 학생식당 1천5백원, 커피는 한잔에 2백원만 들이면 되니 절약하기엔 좋은 환경입니다.

그래도 책 사보고 싶을 때 원하는 책을 사볼 수 있고 누가 술한잔 사면 나도 술한잔 살 수 있는 여력쯤은 되니 그다지 불안하거나 비관스럴 것도 없습니다. 공부요? 너무 재미있습니다. 가족학 분야엔 남자 학생이 드문데 나는 특히 결혼도 했고 애도 키워본 사람인데다 내가 하려는 일과도 연결돼 있어 더욱 재미있습니다.

이 연구소 자리가 참 좋죠? ‘언제 내 개인적인 일로 독립할 때가 되면 이리로 가겠다’고 이미 수년전부터 눈여겨봐뒀던 자리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인사동이 가까워 점심 먹고 산보삼아 한바퀴 돌며 그림도 구경하고 찻집에서 차 한잔 마시고, 정말 좋습니다. 바로 내가 회사에 있으면서부터 내내 생각해뒀던 그림 그대로입니다. 부럽지요?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건 우리 사회의 경영자도 조금만 더 가정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어쩌다 일찍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가정에 충실하려는 직원을 반회사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는 것도 큰 배려입니다. 가정과 일은 절대 따로가 아닙니다. 안정된 가정이 곧 회사의 생산성과 경쟁력과 직결되니까요.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정도 함께 생각해달라는겁니다. 아주 조금만 더.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기자 mar10@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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