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구씨는 원래 ‘仇氏’이다. 구씨성은 능성(또는 능주) 구씨(貝氏) 단일본이었다. 그런데 창원구씨가 조선조 정조때 구씨(具氏)로 사성(賜姓)되면서 또하나의 본이 됐다. 사성이라기 보다 어명(御命)에 의해 개성을 했다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경남 창원의 옛 지명은 신라때부터 인근지역과 합쳤다 갈라지면서 굴자(屈自), 의안, 의창, 회산(會山) 등으로 개칭되어 왔다. 그래서 간혹 옛 지명(地名)을 관향(貫鄕)으로 쓰는 가문(家門)이 있어 이들 지명을 앞세운 구씨는 모두 창원구씨가 틀림없다.

창원구씨의 시조는 구성길(具成吉), 자는 완지(完之)로 고려초에 찬성사(총리급)를 지냈으며 혜종 2년(945)에 의창군에 봉해졌다. 그의 묘소는 강원도 영월에 있다고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구성길의 아들 희(喜)도 찬성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다.

‘仇氏’는 본래 중국 송나라때 대부벼슬을 지내고 치적을 쌓았던 호족 구목(仇牧)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구씨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없다. 시조 구성길과 아들 희에 대한 관직만 간단히 전할 뿐 400여년의 중간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조선조 초기 인물인 구설(具雪)을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 종길을 중시조로 모신다. 종길은 조선조 세종 4년때 직제학을 지내고 역학에 뛰어났으며 천품이 어질고 온화했다고 한다. 자는 자안(子安), 호는 천곡(川谷)이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벼슬에는 관심이 없어 후배양성에만 전념했다. 그의 문하생들은 줄줄이 과거에 급제했다.

동국여지승람에 그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구종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편모슬하하였는데 어느날 급제하여 돌아온 문하생의 축하 잔치에 초대를 받아 어머니를 모시고 참석했다. 호화스런 잔치를 본 모친 김씨는 아들에게 “너한테 배운 사람이 다 급제하여 부모를 영화스럽게 하는데 너만이 응하지 않으니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벼슬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으나 어머니의 분부가 엄해 할 수 없이 과거길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조선조 세종 4년(1422) 가을이었다. 그때 경과(과거의 일종)가 있다고 해 한양에 올라갔으나 과거는 이듬해 봄에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귀향하면 다시는 한양에 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 병조정랑 벼슬에 오른 문하생이 있어 넌지시 부탁을 했다.

“위로는 늙은 어머님이 계시고 나는 병이 들었으니 앞으로 한양에 올 길이 없을 것 같네. 그동안 장안의 성곽(城廓)누대는 두루 구경을 했지만 궁궐은 들어가 보지 못해 한이 되는 구먼” 원래 대궐안은 외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비공식으로 대궐구경을 시켰다.

궐안을 두루 살피며 감탄하는 동안 어느덧 짧은 가을해가 칠흑으로 변했다. 하는 수 없이 병조의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따라 경비 강화 어명이 떨어져 제자는 아문(衙門)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청지기를 시켜 주안상을 보내줬다. 대궐안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니 자못 감회에 젖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북소리에 홀려 자신의 위치도 잊고 목적없이 궐안을 더듬었다. 어느 깊숙한 곳에 당도하니 날아갈 듯한 높은 누가와 맑은 연못, 그림같은 다리에 능파정(凌波亭)이 황홀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다. 좌우 층계에는 백화가 뿜어내는 꽃향기로 가득한 후궁화원이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을 때 가을 달빛에 취한 세종대왕도 옥교를 거닐고 있었다.

* 창원구씨대종회(회장 구상진 변호사)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가락구 봉천6동 1690-159. 서광빌라 가동 202호. 전화는 (02) 878-280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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