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수출구조는 환율만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천수답(天水沓) 형태입니다. 원화 가치가 올라가거나 엔 가치가 내려가면 수출전선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환율기우제’라도 올려야 할 실정입니다.” 한국은행 이성태 조사국장은 우리나라 수출이 환율에 이처럼 목을 매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제품 자체의 품질 경쟁력보다도 아직도 가격 경쟁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출호황에 힘입어 고성장 가도를 질주하던 우리나라 경제가 ‘원고(高)-엔저(低)’의 이중덫에 걸려들고 있다. 가파른 원화가치 상승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엔 가치마저 약세로 돌아서면서 무역수지 관리에 비상등이 켜지고 있는 것이다.

무역수지는 바닥을 헤매는데 외국인 투자자금의 대량 유입으로 환율하락 압력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어 수출은 더 힘들어지고, 경상수지는 더욱 후퇴하는 악순환 징후마저 나타나고 있다.

사실 1998년이후 대규모 무역수지 흑자는 우리 경제의 실력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높게 형성됐던 환율 덕이 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 환율 수준이 무역수지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무역협회 분석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10% 절상되면 수출은 40억달러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엔화가 10% 절하될 경우에는 수출이 23억달러 줄고 수입 역시 7억달러 줄어 무역수지가 16억달러 악화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달러공급 우위, 원화가치 상승 거품

원·달러 환율의 행보가 여간 심상치 않다. 하루에도 10원씩 급등락을 거듭하는 등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연초 1,140원대이던 원·달러 환율은 1,110원대까지 주저앉았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서 수출업체의 가격경쟁력이 덩달아 약화, 무역수지 흑자기조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원화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우리 경제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징표지만 최근의 원고 현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펀드멘털(실물경제)의 건전성을 반영했다기보다는 ‘바이 코리아(Buy Korea)’ 열풍을 타고 거세게 밀려드는 달러의 공급우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원화가치 상승에 거품이 끼고 있다는 증거다. 외환시장에 달러가 넘쳐나면서 달러를 팔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살 사람은 적다보니 자연스럽게 달러 가치는 떨어지고 원화 가치는 높아질수 밖에 없다.

달러 유입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1월 15억7,000만달러, 2월 20억7,000만달러에 이어 이달 들어서도 13일까지 20억달러 정도가 추가로 유입됐다. 이에 따라 금년 들어 현재까지 외국인 주식투자자금 순유입액은 56억달러를 돌파, 1·4분기도 채 지나기전에 지난해 연간 유입액(51억9,000만달러)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들 달러가 대부분 단기성 자금이라는 것이 큰 문제다. 경제여건이 조금만 불확실해지면 언제든 빠져나갈 자금인만큼 안정적인 환율관리 등 거시경제의 독소로 잠복해 있다.


외국인자금 유입, 환율관리에 부담

외환시장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달러의 급속한 유출입에 따라 환율이 롤러코스터식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시장관계자들은 “마치 둑이 무너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고 털어놓는다. 정부가 외평채 발행과 시장 개입 등 환율방어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넘쳐나는 달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외국인 증권자금 유입은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단기간에 너무 많은 자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환율관리와 수출에 지나치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신금덕 외환은행 경제연구소 국제연구실장은 “올 한해 달러 공급우위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만큼 원화 가치 상승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면서 “하반기에는 1,100원대도 위협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이에 대해 무역관계자들은 “환율이 1100원대 밑으로 떨어지면 채산성을 맞추지 못해 수출을 포기하는 업체들이 속출하게 될 것”으로 우려했다.

더더욱 어두운 현실은 주요 선진국 및 아시아 개도국의 환율은 오른 반면 우리나라 환율은 계속 하락, 수출가격 경쟁력이 이중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원화 가치는 올 들어 3일까지 2.2% 상승(환율은 하락), 우리나라와 수출경쟁관계에 있는 주요국 중 대만을 제외할 경우 가장 큰 절상폭을 기록했다. 일본 엔화환율은 올해 들어 5.1%나 하락했고 유로화와 독일 마르크화는 3.9% 떨어졌다. 영국(파운드)은 2.4%, 싱가포르(싱가포르 달러)는 3.2%, 태국(바트)은 1.5%, 인도네시아(루피아)는 4.7%, 홍콩(홍콩 달러)은 0.1%씩 절하됐다.


엔화 약세, 수출에 비상

특히 엔저가 걱정이다. 그동안 급격한 원고에도 수출업계가 버텨온 것은 엔고때문. 엔고 현상으로 일본과 경합관계에 있는 우리나라 수출품이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고 수출이 증가하는 반사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사정이 확 달라졌다. 엔화 환율은 연초 달러당 103엔대에서 110엔대까지 상승했다. 일본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돈을 계속 풀겠다는 입장이고 미국의 연쇄적 금리 인상으로 ‘강한 달러’는 계속될 전망이어서 엔화 약세는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달러당 120엔대까지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원고-엔저 현상으로 올들어 엔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금년들어 7.6% 상승했다. 대일(對日) 수출가격경쟁력이 7.6% 나빠진 셈이다.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조선 가전 자동차 등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주요 업종이 치명타를 입게 된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내 진출 외국 기업인 및 해외 경제전문가들을 상대로 실시한 한국경제전망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도 올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협요인으로 원화 가치의 상승을 들었다. 환율 관리에 정책의 최우선권을 둬야 한다는 경고다. 이와 함께 지나치게 환율에 의존하는 수출구조에서 탈피, 기술과 품질, 브랜드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급선무다.

김병주 경제부기자


김병주 경제부 bj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