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가·저소비·성장분야 중심으로 재편돼야

엄낙용 재정경제부 차관 주재로 고유가 동향점검 관계부처 대책회의가 열렸던 3월7일 산업자원부 기자실. “뭐 특별한 대책이 있겠어? 기껏해야 에너지절약 캠페인이나 비축유방출, 유류세 탄력조정쯤이겠지.” 한 일간지 기자의 말에 산자부 직원을 비롯한 대다수 기자들은 자조섞인 웃음과 함께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고유가는 얼마간은 불가항력적이고 무차별적이다. 산유국이 적게 파내서 값이 오르는데 우리 정부가 무슨 묘수가 있겠냐는 점에서 그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주요 수출경쟁국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산유국이거나 수입국가기 때문에 우리나라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고유가 악몽

하지만 중화학공업 위주의 대규모 장치산업의 비중이 높아 에너지 수입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국내 산업구조는 ‘기름값’이라는 말만으로도 주눅이 든다. 1973~1974년 4차 중동전쟁(1차 오일쇼크)과 1979~1980년 이란혁명(2차 쇼크) 당시 1년동안 유가가 3~4.5배 폭등, 우리나라의 경우 40%가 넘는 도매물가 인상과 무역수지 악화, 내수침체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비축분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고 민간부문의 대체에너지도 생산되고 있는 현재는 당시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하지만 부존자원이 부족해 원자재를 해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가공무역·수출의존형 수입구조의 굴레 속에 기름값 인상은 시설·자본재와 원자재가격 인상과 직결되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유가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우리 경제에 안길 수 밖에 없는 실정인 것이다.

걸프전 이후 최고치 경신의 행진을 이어가던 유가가 3월 중순 이후 다소 안정세를 찾고 있다. 지난해 3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14개 산유국의 감산결정으로 촉발된 고유가 행진이 감산시한(3월31일)을 10여일 남기고 숨고르기에 접어든 형국. 3월2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릴 OPEC 각료회의에서 감산연장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산업, 특히 무역수지의 유가 취약성은 이와 무관하게 우리 산업이 풀어야 할 장기적이고 고질적인 숙제다.


유가·원자재가격과 무역

산업자원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총수입중 원유 비중은 15.4%(184억달러). 소비에너지 가운데 원유 의존률은 무려 54.1%로 액화천연가스나 전력 유연탄 등을 포괄한 총에너지의 해외의존도는 97.3% 수준이다.

원유값 인상은 생산비에서 원유비중이 80%에 이르는 정유산업은 물론 유류비중이 높은 철강과 석유화학과 운수 전력 등도 피해가 큰 업종. 원유 도입단가가 1달러 오를 때마다 수입이 9억달러 증가하고 수출이 1억달러 감소, 무역수지면에서 10억달러의 악화요인이 발생한다는게 산자부 추정. 올해의 경우 정부가 예상한 원유도입 평균단가는 배럴달 23달러였지만 지난 1, 2월은 예상치를 3~5달러 이상 초과했다.

무역협회는 올해 원유 평균 도입단가가 지난해(16.9달러)보다 30%(22달러) 상승할 경우 국내 제조원가는 1.54% 상승압력을 받으며 25달러(48%상승)에 이를 경우 무려 2.46%가 원가절상된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국내 수입구성의 가장 큰 비중(50%내외)을 차지하는 원자재 가격도 유가와 동반상승하는 것이 상례. 과거와 달리 1990년대 이후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소비재의 비중은 10% 내외로 미약한 반면 대부분의 수입이 원자재 및 자본재(40%내외)로 채워지면서 수입단가 상승이 물량감소효과를 보이지 않는, 이른바 가격 비탄력구조여서 유가인상의 다중적인 부담이 불가피한 것이다.


대책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은 당연히 ‘덜 쓰는 것’이다. 이는 주요 선진국도 마찬가지. 미국의 경우 10대 업종에 대해 에너지 관련 연차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1992년 이후부터는 최저효율기준을 제정, 이에 미달하는 제품의 생산을 금지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산업체 에너지효율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이탈리아와 캐나다 일본 등은 에너지 소비효율 관리사 고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1998년이후 ‘에너지 다소비 사업장 자발적협약’제도를 추진, 에너지절약 협약 이행실적을 평가·독려하고 있다. 이와 관련, 탄력세율 재조정 등 단기 대책보다 시장가격을 통한 소비합리화의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국제유가 전망과 대책’보고서에서 에너지소비 효율화를 위한 투자지원 및 기술개발 지원 외에 “경제·사회의 비효율적 에너지 소비구조를 시정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시장 경쟁가격을 여과없이 기업및 소비자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메카니즘, 즉 가격체계 및 조세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석유소비가 탄소세부과 등 환경부담으로 이어지는데다 본격적인 고유가시대로 접어드는만큼 국내 산업의 에너지절약형 소프트구조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말 ‘유가급등에 따른 영향과 대응’보고서를 통해 “OPEC의 감산과는 무관하게 사실상 저유가시대는 종료됐다는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며 “고유가를 전제로 한 미래 사업구조로 경영시스템을 혁신할 것”을 제시했다.

삼성연구소측은 “특히 글로벌화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금융영향력 증대로 유가는 조그마한 사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급등락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에너지집약형 산업이 공해를 유발하고 기술혁신의 여지가 적은 반면에 하이테크, 소프트·서비스 등 고부가 저소비 성장분야를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전환·재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윤필 경제부기자


최윤필 경제부 walde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