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스타열전] ③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下)

2000 03/22(수) 23:33

잡초같은 생명력 지닌 '승부사'

“디지털 시대라 해서 속도를 하도 강조하다 보니 꾸준함과 차근차근함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너무 엷어졌어요. 그러나 바닥을 다지지 않는 속도는 거품입니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래성이죠.”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혁명을 선도하는 젊은 벤처인에게 던지는 정문술 사장의 충고는 한마디로 ‘내실’이다. 남들보다 생각이 앞서면 다소 천천히 가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게 그의 지론. 그래서 그는 한박자 앞선 안목과 결정을 CEO(최고경영자)의 덕목중 최고로 꼽는다. 누구나 공감하는 평범한 진리지만 현실에 접목시키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미래산업의 초창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앞서가려고 해도 척박한 기업환경이 따라주지 않았다. 미래산업을 창업한지 1년쯤 지났을까. 정문술 사장은 반도체 조립에서 가장 기본적인 장비인 리드 프레임 매거진 분야 진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리드 프레임 매거진이란 반도체 조립 과정에서 리드 프레임이라는 반도체 소자에 단자를 부착하기 위해 사용되는 복잡한 형상의 금속상자. 당시만 해도 국내업체들은 일본산 금속판을 수입해 손으로 일일이 조립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금속판을 그렇게 짜맞추다 보니 속도를 중시하면 나중에 오차가 생겼고, 오차를 줄이려면 생산성이 떨어졌다. 속도는 높이되 오차는 줄이는 방법을 찾아내는게 급선무였다. 미래산업 전직원은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일에 매달렸다.

몇 개월이 흘렸다. 그러나 진척은 없었다. 사람들은 지쳐가고 거래선은 하나둘 떨어져나갔다. 모두들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던 풍전기공의 참담한 악몽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디어로 시작된 미래산업이 신화

그러던 어느날 체념에 빠져있던 정문술 사장의 입에서 짜증섞인 푸념이 흘러나왔다. “에이, 빌어먹을! 조립하지 않고 통채로 팡팡 찍어버렸으면 좋겠네.” 모두들 사장의 푸념에 더욱 절망감을 곱씹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 순간 기술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정말 그러면 되겠는데요. 금형으로 찍어버리는 겁니다”라고 맞장구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남들이 금속판을 일일이 짜맞추는 사이 미래산업은 금형으로 매거진을 팡팡 찍어냈다.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였지만 남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미래산업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기술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봤어요. 더 이상 해볼게 없었어요. 아이디어는 그럴 때 나온 겁니다. 몇 개월간의 시행 착오와 좌절, 절망 끝에 나온 거라구요.”

반도체 장비기술로 우뚝 선 미래산업은 새천년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인터넷 분야에서 남보다 앞서 갈 생각에 빠져 있다. 정문술 사장에게는 풍전기공의 참담한 실패와 멋지게 재기한 미래산업에 이은 세번째 도전인 셈.

그 도전은 인터넷 검색엔진인 라이코스 코리아를 통해 차근차근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라이코스 코리아때문에 ‘평생 직업으로 삼았던 반도체 장비분야에서 외도를 한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듣게 되지만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회사에 비전을 보여주고, 꿈을 심어주는게 CEO의 임무지요. 앞서 가는 사고만이 그걸 가능하게 만듭니다. 난 이미 4년전에 인터넷 세상이 올 거라고 보고 인터넷 보안 솔루션 개발업체를 세웠어요. 그러니 외도라는 말은 틀려요.”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벤처형 인간

그가 세운 보안 솔류션 개발업체 소프트 포럼은 지난해 말 현재 60~70%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세계적인 인터넷 검색엔진인 라이코스와 손을 잡고 인터넷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정문술 사장과 40여년 지기인 신평재 교보증권 상임감사는 라이코스 코리아가 곧 인터넷 검색엔진 분야에서 최고자리에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이유는 정 사장의 강한 승부욕때문. 신감사는 “잘 나가던 공무원 시절에 그 친구도 화투 꽤나 쳤어요. 평소 그를 잘 알던 주변 사람도 화투패를 앞에 놓고 보인 그의 승부욕에 혀를 내둘렀어요”라고 귀뜸했다.

남들에게는 냉혹한 승부사로 평가받는 정문술 사장이 스스로는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 “한마디로 용수철같은 형”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밀려내려가지만 조금만 환경이 바뀌면 다시 튀어 오르는 형이라는 말이다. 전형적인 모험가요, 요즈음 말로 하면 타고난 벤처형 인간이다.

돈이라면 그도 벌만큼 번 사람이다. 미래산업의 주가총액은 대략 1조원 안팎. 정문술 사장은 회사 지분의 30% 가량을 갖고 있으니 주식만 팔아도 3,000억원대의 재력가다. 요즈음 코스닥에서 ‘난다 긴다’하는 젊은 벤처 기업인과 비교해도 그렇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돈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잼병이다.

미래산업 초기부터 까다로운 은행대출보다 이자는 비싸지만 손쉬운 사채를 끌어다 썼고 그 흔한 재테크하고도 담을 쌓고 살았다. 사업을 하다보면 은행돈을 쓰는게 오히려 득이 될 때도 많을 터인데 그는 고집스럽게 은행과 거리를 두었다.

미래산업을 나스닥에 상장시킨 올 2월 뉴욕의 월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던진 질문 가운데 하나가 ‘금융기관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채비율이 낮느냐’는 거였다. 그때 그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사업하면서 빚지는게 체질적으로 싫어서. 누가 뭐래도 이것만은 내식대로 한다”고 했단다. 물론 무차입 경영은 20년전 피눈물을 쏟았던 풍전기공의 실패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호나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

그가 끔찍이 싫어하는 것은 또 있다. 허세다. 서울 여의도의 굳모닝 타워빌딩에 있는 사장실을 찾아갔을 때 순간적으로 제대로 찾아왔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사장실의 안내판도, 응접실도, 명패도, 아무 것도 없었다.

바로 옆의 라이코스 코리아 사무실과 하등 다를게 없었다. “그게 뭐 필요합니까. 나는 쓸데없는 겉치레를 싫어해 구호나 말보다는 실천과 몸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라며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1994년 충남기업인 대상을 차지하고 난 뒤의 일이다.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연락이 오더니 이틀전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이곳 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공연히 불안하고 뒤숭숭해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내 방까지 처들어 왔다.

그리고는 “사장님, 건물이 아주 멋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더니 “그나저나 사장실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사장실에 불쑥 들어와 놓고서는 사장실을 찾다니. 여기가 사장실이라고 했더니 “원, 참! 이런 사장실도 다 있나, 그래”라고 했다.(정문술 지음 ‘왜 벌써 절망합니까’중에서)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면서도 정문술 사장을 한마디로 정의할 말을 끝내 찾지 못해 옆에 있던 가종현 미래산업 경영지원팀장에게 불쑥 물었다. 정 사장님은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냐고. “바둑계에서는 서봉수 9단이 ‘잡초’로 통하지요.

사장님도 특별히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 않고 실전으로 실력을 키워 정상에 올랐다는 점에서 서9단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미래산업은 어렵고 힘들 때 더 강한 기업으로 변하죠. 사장님은 항상 미래산업을 일으켰을 때의 초발심(벤처정신)을 잃으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분입니다.”

오늘날의 미래산업을 만든 힘은 바로 이런 정신력이 아닐까.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jin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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