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는 '반 도사'

명상음악가 김도향(55)씨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다. 정신을 차릴 것. ‘개꿈’꾸지말 것. 그저 삶이 오라는대로 묵묵히 따라갈 것. 이 세가지만 지키면 불행까지도 그 해석이 달라진다. “잘 안되는게 좋은거라니까요! 정신을 차리게 해주잖아요. 일이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좋고, 안되면 안되는대로 더 정신을 차리게 해주니까 좋은거예요. 그 때만 잠시 화가 날 뿐이지 지나고 보면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어요.”

1970년대 유명가수이자 CM송의 귀재. 갑자기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은 명상가로 변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최근 김씨는 (주)준걸정밀이라는 사업체의 대표로 자리해 있다. 왕년의 가수가 이젠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서는가 싶지만 실상은 그런 것도 아니다.

그가 다루는 제품은 몇몇 대형 백화점이나 외식업체 등에서 선보이고 있는 화장실용 명상음악장치인 ‘클린테크’. 즉, 버튼을 누를 때마다 변기의 1회용 비닐시트 덥개가 자동으로 교체되면서 명상음악이 흘러나오게 만든 장치다.

아직 명상음악에 대한 인식이 낮아 당장 큰 수익을 장담할 순 없지만 ‘화장실이야말로 몸과 함께 영혼이 정화되는 장소’라 그에겐 늦출 수 없는 일이 됐다. 조만간 철도청에도 찾아가 새마을호 객차내 설치문제를 협의할 것이라는 그는 아마 그 자리에서도 이 소리를 할 지 모른다. “이걸 쓴다고 해서 당장 덕을 보는건 없을거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니까!” 몇해전 ‘태교 명상음악’이나 ‘수험생을 위한 명상음악’ CD를 기꺼이 내주던 음반회사 사장에게도 초면부터 솔직히 털어놓은 얘기다. 무엇보다 세상 구석구석에 명상음악을 퍼뜨리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다.


정신이 맑아야 창의력도 생기는 법

“그래도 태교용 음반은 100만장이나 팔렸어요. 가요음반 100만장과는 개념이 또다르죠. 아직 명상음악을 이해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명상음반을 내준다는건 제가 봐도 음반사 사장들이 참 용감했다는 겁니다.

물론 내용에 대한 믿음부터 있었겠구요. 수험생용 명상음악만 해도 실제로 제 후배의 딸을 데리고 먼저 실험을 했었는데 처음엔 반에서 48등 하던 애가 나중엔 6개월만에 전교 6등까지 올라갔어요. 명상음악은 듣기만 좋게 만든게 아니예요. 우리 인체의 장기마다 맞는 소리가 따로 있는데, 예를 들면 방광에는 폭포소리, 위장에는 종달새소리같은 높고 맑은 새소리, 또 담에는 넓게 퍼지는 버꾸기 소리같은게 어울려요.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 몸의 각 장기에 맞는 소리들을 복합적으로 이용해 음악을 만들면 기(氣)의 분할이 좋아지고 뇌파도 알파파로 바뀌거든요. 이렇게 해서 정신도 맑고 일의 효율도 높아지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근본적으로 정신이 맑아야 창의력도 나오는 건데, 대부분 이것은 무시한 채 허겁지겁 일만 서두르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아침엔 9시쯤에야 일어난다. 취침시간이 대개 새벽 4시반 무렵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가족과 함께 TV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요가와 명상, 도인체조까지 마친뒤에야 잠자리에 든다. 회사에 나와서도 일과 명상, 작곡일이 경계없이 섞인다. 명상을 시작한지 약 20년. 이젠 길을 걷거나 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명상을 할 만큼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잠깐씩 정신을 맑게 비우고 나면 금새 머릿속엔 어떤 소리들이 스물거리기도 한다. 그것을 받아적으면 악보다. 그의 음악은 그렇게 태어난다.


노래떠난지 20년, 이젠 별 관심없어

그의 책상 옆으로 보이는 기타 케이스 하나. 여전히 노래를 즐기는가 싶었는데 정반대의 대답이 나온다. “열린음악회 출연 때문에 연습하려고 잠시 갖다둔거예요. 너무 거절하면 ‘잰다’고들 해서 하는 수 없이 응낙할 때가 있죠. 하지만 솔직히 노래엔 이제 별 관심 없어요. 20년동안 노래방에 가본게 두 번이나 되나? 그것도 하도 우리 딸이 졸라서 할 수 없이 간거고. 또 관심없어진거요? 음…섹스! 그것도 관심잃은지 오래 됐고 술 마시는것도 재미없고. 다만 담배는 음악작업 때문에 계속 하게 되더라구요.”

재미있는 것도 달리 없다. “그냥 살아서 숨 쉬는 것도 재미있다면 재미있고, 인생이란게 그냥 그런거죠. 특별히 좋거나 싫은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이렇게 사는 자체로 만족스러워요. 그냥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나 그런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고.”

그도 아주 가끔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어쩌다 이곳까지 왔는가 그 자신도 생경해지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학원수학의 창시자로 유명했던 수학자 김현준씨. 그러나 거의 평생을 밖으로만 떠돌았고 주변엔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가정은 늘 혼란스러웠다.

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항상 고통 속에 놓여있던 어머니. 아버지의 직장이 바뀔 때마다 그 뒤를 따르느라 모자는 무려 87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워낙 잦은 이사에 외아들인 김씨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한번 제대로 사귀어 보지 못했다. 어쩌다 두 모자의 생활비를 타러갈 때서야 만나던 아버지는 멀기만 했다. 완전히 끌어안지도, 미워할수도 없는, 심란한 부자지간이었다. 어려서부터 세상에 유리관을 씌어놓고 물끄러미 관조하는 버릇이 그때부터 생겼다.


혼란스런 어린시절, 생계위해 밤무대에서 노래

그는 타고난 가수도 아니었다. 고등학교때도 음악점수 60점을 넘겨본 일이 없었다. 다만 낙천적인 성격에다 남들 앞에 나가 시선을 끌거나 분위기를 잡는 일은 그의 특기였다. 경기고를 다닌 그가 졸업후 난데없이 영화감독 얘기를 꺼내며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모두 어처구니없어 했다. 실제로 그후 영화감독이 되지도 못했다.

군복무중 제대후의 진로를 생각해보니 자신이 어머니를 모시며 생계를 책임지기엔 무리수였다. 계획대로 영화판에 뛰어들자면 당장 조감독 생활부터 시작해야되는데 그것은 반 거지생활이나 다름없는 수입을 의미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수였다. 군복무중 사전준비도 마쳤다. 제대전 약 1년동안 그는 몇 명의 군인들로 팀을 구성해 하루 6시간씩 연주와 노래연습을 계속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노래실력은 그 1년간의 맹훈련의 산물인 것이다.

제대후 캬바레며 나이트 클럽 등지에서 오디션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보는 곳마다 모두 합격. 그렇게 해서 다닌 업소가 하루 평균 다섯군데였다. 밤무대 수입은 오히려 나중의 가수시절보다 더 많았다. 택시비가 60원, 공무원 월급이 1만원 수준이던 그때 그는 한달에 50만원을 벌었다. 그러다 방송 데뷔의 기회를 만났다.

한 캬바레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스타 이미자씨가 앞 순서였던 김씨의 노래를 들었는지 대뜸 그에게 모 방송국의 누구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찾아가자 방송국 관계자는 그의 노래를 들어본 뒤 곧바로 TV에 출연시켰다. 방송에 데뷔한 과정은 그렇게 단순했다. 그 뒤 가수 손창철이 합류하면서 ‘투코리안즈’가 만들어졌고 당시로선 이색적인 재즈풍의 히트곡 ‘벽오동 심은 뜻은’ 등으로 한동안 큰 인기를 누렸다.

“전 가수였을 뿐이지 스타가 되겠다는 ‘개꿈’은 진작부터 없었어요. 1974년 대마초 한번 피웠다가 출연금지당했을 때도 나와 같이 대마초사범으로 걸린 다른 가수들은 어떻게든 다시 방송에 복귀하려고 이리저리 교도소 위문방문도 다니며 정부나 주위 눈치를 많이 봤어요.
하지만 전 꼭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고, 정 아니면 이참에 포장마차나 하지 뭐, 그랬어요. 그러다 1977년 누군가가 CM송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든게 ‘줄줄이사탕’이었는데 그게 바로 히트한거예요. 그렇게 시작해서 만든 CM송이 지금까지 4,000곡쯤 돼요. 아마 제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들었을거예요. 한편에선 ‘천재성’이 있다고까지 할 정도였죠.”


보이지않는 존재에 대한 몰두

잘 나가던 CM송의 천재를 자진폐업하게 만든 건 엉뚱하게도 한 그루의 가로수. 낙엽이 유죄다. 그 상황은 그의 가수생활 후반기에 내놓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의 가사 그대로다. 어느날 창 밖을 보노라니 눈 앞에 낙엽이 떨어졌다. 갑자기 의문이 솟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 낙엽은 바닥에 자기가 떨어질 자리를 정확히 알고 그렇게 한치 틀림없이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일까’라는 것. 한편에선 자신이 그렇게 천재적이란 소리까지 들으며 정력적으로 쏟아내던 CM송이며 모든 아이디어도 어쩐지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게 아닌 것 같다는 의구심도 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전하는 소리를 자신은 그저 중간에서 전달하기만 한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한 기수련자가 자신을 찾아왔다. 역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를 따라 1980년대초부터는 음악활동도 잠정적으로 중지하고 매일 저녁 6시에 시작해 새벽 1시까지 약 2년동안 명산과 참선, 기수련 등에 몰두했다. 신체적인 단련뿐 아니라 동양의학과 철학도 섭렵했다. ‘진작 이 재미있는 일을 왜 하지 않았나’고 후회할 만큼 그는 신이 났고 열성적이었다.

“한때는 소백산 토굴에도 들어간 적이 있어요. 들어갈 때 먹을거랑 필요한것을 2만원어치 사갖고 들어갔는데 한달동안 그 2만원어치도 채 다 못쓰고 나오는게 인생이더라구요.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돈은 얼마 안돼요. 욕심만 버리면 돈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명상에 관해선 그도 과욕을 부려본 적이 있다. 아마추어 명상가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초능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연이어 밤을 새며 몸을 혹사시키다 죽음 직전까지 다녀왔다. “명상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일이 아니지요.
특히나 전 속세에 한 발을 두고 있으니 온전히 그 분야에만 계시는 분들보다 더 걸리는 일이 많아요. 오늘까지 20년동안의 변화란 이런거예요. 옛날엔 화가 나면 먼저 욕부터 나왔는데 10년쯤 수련하고나자 ‘에휴…’ 하는 정도. 그리고 이제는 바람 한 점 훅 불고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점점 작아지는, 그런 정도로 달라졌지요.”


수지 안맞는 작업, 그래도 명상음악은 계속

태교명상음악이 인기였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그가 내는 모든 음반은 개인적으로 적자다.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태교음악은 10년에 걸쳐 만들었고 수험생용 음악은 약 3년, 하나의 음악에 최소한 평균 5년은 제작시간이 걸린다. 이 수지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는 요즘 후속곡을 쓰고 있다.

내년쯤 발표할 ‘편안한 죽음을 위한 명상음악’. 태교음악에서부터 출발해 이제 죽음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속되는 그의 행진이다. 이것 역시 화장실용 명상음악보다 경제적으론 더 부담이 따를 일이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날 때 7개의 혼줄을 끊기가 참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해요. 편안하게 사는 것 만큼이나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거죠. 이번엔 인도의 전통악기 씨타와 우리의 대금소리, 약 500명의 합창진동음등을 넣어서 그 죽음의 순간까지도 보다 편안하고 즐겁게 맞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빠르면 올 9월경 인터넷에서 선보일 정신질환 및 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명상음악치료 프로그램 ‘3분 세라피’를 비롯해 가상공간 안에 또하나의 자기를 만들어내는 종합관리프로그램 등 그외에도 그가 가진 아이디어들이 줄지어 대기중이다. 자기 손으론 클릭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컴맹인 김씨.

그러나 반짝이는 생각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N세대를 웃도는 이 만년 아이디어맨과 헤어진 뒤 이상하게도 이야기 도중 무심코 흘려들었던 한마디가 계속 발꼬리를 잡고 따라왔다. “우연은 없어요.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분명히 필연에 의한거예요.” 대체 이 필연의 뜻은 그럼 무엇일까. 왜 나는 굳이 그를 찾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그 답을 찾는답시고 정신을 팔다가 나는 하마터면 마포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정영주·자유기고가 김명원·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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