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3종류의 가위가 있다. 그 가위로 아무렇지 않게 필름을 잘라낸다. 그것은 영화 제작의 마지막 단계인 감독이나 제작자의 편집과는 다르다. 완성된 영화에 대한 훼손이다.

군사독재 시절 그 가위의 주인은 정부였다. 체제비판적 영화에 대한 재갈이었다. 그 가위질을 못견뎌 영화를 포기한 감독도 있었고 관객들은 행간을 찾아 읽어야 했다. 오히려 선정과 폭력에는 관대했다. 국민의 영화적 관심을 그곳으로 몰아 자신의 체제유지에 이용하기도 했다. ‘구로 아리랑’은 아직도 그 시대의 아픈 상처를 가진 작품으로 남아있다.

또다른 가위의 주인은 제작사와 수입사다. 그들은 두개의 가위를 갖고 있다. 하나는 실제 자신의 것이 아닌, 검열기관이 맡겨놓은 가위. 정부는 이제 더이상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대신 수입보류, 등급보류라는 무기로 제작자와 수입사 스스로 가위를 들게 한다.

심의규정, 음란성, 작품성 여부를 떠나 ‘거짓말’이 13분 잘려나갔고 ‘감각의 제국’은 17분이나 자진삭제됐다. 그들은 아예 개봉 못하는 것보다 절음발이라도 개봉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식이다. 제작사나 수입사는 그렇게 해서 화제가 되면 오히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적극 활용하는 상술까지 보인다.

영화사나 제작사가 가진 또하나의 가위는 극장과 함께 철저히 장삿속으로 준비한 것이다. 어떤 외부적 규제나 압력이 없는데도 그 가위는 영화를 잘라버린다. 1997년 삼성영상사업단은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가 국내 상영되면서 8분을 잘랐다. 중학생 관람가를 받아 보다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려는 얄퍅한 계산에서였다. 관객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다 감독이 문제를 삼자 뒤늦게 알고 불쾌해 했다. 자기 영화의 홍보차 한국을 찾은 뤽 베송 감독은 화를 내며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갔다.

대만 후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2시간40분)처럼 무려 1시간이나 잘린 경우도 있다. 단지 영화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변명은 지루한 부분을 손질해 영화의 긴장과 재미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런 일은 일부러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내막은 하루 상영횟수를 늘려 수익을 올리려는 수입사와 극장의 합작이다. 2시간이 넘는 영화는 하루 5회 밖에 상영하지 못하지만 20분을 줄일 경우 6회 상영이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 영화의 경우는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극장에서 상영을 꺼리기 때문에 아예 2시간을 넘는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

영화가 길다는 것과 지루하다는 것은 다르다. 영화는 소재와 이야기에 따라 그 길이가 다르다. 무조건 짧은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약간 지루하더라도, 감독이 의도한 것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예술에 대한 존중이다.

영화를 자연스럽고 완성도를 높이는 길이다. 때마침 그것을 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영중인 외화 ‘리플리’(감독 앤서니 밍겔라)는 원래 2시간17분짜리.

그러나 수입사는 그것을 7군데 16분20초를 자르고 2시간40초 길이로 하루 6번 상영하고 있다. “수입가가 워낙 비싸 큰 손해를 볼것 같아 부득이 잘라내야 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과 관객이 지루해 하는 부분을 잘라 이야기 전개에는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다르다. “영화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 크레딧도 없이 급하게 끝나 영화의 여운을 즐길 시간도 안 준다”는 것이다.

같은 가위질이라면 타율보다 자율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작품의 완성도나 재미를 높이는 것이라 해도 예술에 대한 훼손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스탠리 큐브릭 감독 같은 사람은 차라리 상영을 하지 않으면 안했지 자기 영화에 손을 못대게 한다.

그의 고집이 아니었으면 ‘감각의 제국’까지 개봉하는 마당에 그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은 벌써 한국에서 개봉됐을 것이다. 영화인이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 이전에 스스로의 가위부터 없애야 한다. 그래야 ‘장삿꾼에 불과하다’는 소리도 줄어든다.

이대현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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