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칼럼] 현대판 용의 눈물

2000 03/23(목) 00:34

그야말로 ‘현대판 용의 눈물’이다.

요즘 한창 연산군의 광기가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는 KBS TV 주말드라마 ‘왕과 비’의 전편으로 ‘용의 눈물’이 방영돼 인기를 끌었었다. ‘왕과 비’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용의 눈물’은 태종의 권력쟁취를 이야기의 중심 줄거리로 하고 있다. 조선조 초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어쩌면 오늘날의 상황과 흡사한지 토·일요일 저녁마다 가급적 이 드라마를 빼먹지 않고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용의 눈물’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무기력한 고려조를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 그리고 그의 네째 아들로 태어난 태종 이방원이다. 왕위 계승권을 받지못한 이방원은 두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친 형과 이복 동생을 몰아내고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다.

이방원에게 ‘유산 상속’을 할 뜻이 없었던 이성계는 ‘상왕’으로 물러앉은 다음 급기야 함흥으로 칩거한다.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한마디’를 들어야 했던 이방원은 줄기차게 ‘함흥차사’를 보내고 아버지는 마침내 아들을 제거하려고 군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요즘 현대그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두고 많은 사람이 ‘용의 눈물’을 말하고 있다.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의 전격 경질을 둘러싸고 정몽구 현대자동차회장과 정몽헌 현대전자회장이 치열한 물밑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양측은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현대그룹의 ‘상왕’격인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을 바라보고 있다. 옛날처럼 칼과 창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어쩌면 훨씬 더 살벌한 ‘왕자의 난’이 지금 현대그룹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은 19세의 나이에 가출, 세계적인 규모의 현대그룹을 만들어낸 ‘한국 현대사의 영웅’이다. 옛날 같았으면 능히 나라 하나를 세우고도 남았을 정도의 신화를 우리 역사에 남겼다. 80의 나이를 넘어서며 어쩔 수 없이 은퇴의 길을 걸어야 하는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영토를 대략 셋으로 나누었다.

자동차와 건설은 차남인 정몽구 회장(MK)에게, 전자는 5남인 정몽헌 회장(MH)에게, 그리고 중공업은 6남인 정몽헌 국회의원(MJ)에게 분할통치토록 했다. 자신이 세운 왕조를 자식 한명에게 모두 맡기는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의 옛 창업자들과는 달리 정복한 영토를 자식들에게 하나씩 떼어맡긴 옛 몽고의 징기스칸과 닮았다.

정치활동과 축구에 관심을 쏟으며 그룹내의 일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MJ와는 달리 MK와 MH는 오래전부터 현대그룹의 주도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여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비록 현대그룹이 여러 개의 ‘소그룹’으로 분할된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또 추진되고 있지만 ‘포스트 정주영’시대가 되면 역시 소그룹 중에서 가장 앞서는 쪽이 대세를 장악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IMF이후의 빅딜 과정에서 MK와 MH쪽은 모두 ‘몸집불리기’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번의 갈등표출은 금융쪽을 자신의 영토로 생각했던 MH의 의사와는 다르게 현대증권의 인사가 이루어진데서 발단이 된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권력과 부를 놓고 가족간에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항상 ‘용의 눈물’같은 얘기는 후세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용의 눈물’의 주인공이었던 사람들은 혹시 후세의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그리고 지금 현대그룹의 주인공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자그마한 가정에서 유산상속을 둘러싼 형제들의 갈등이라면 아무런 얘깃거리도 못되겠지만 현대그룹이라 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지금 당장은 현대그룹의 막강한 위세에 눌려 ‘듣기싫은 얘기’들은 뒷전에 머물겠지만 세월이 흐르면 이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나마 이방원은 훌륭한 업적을 세워 후세의 평가를 얻었지만 지금의 주인공들은 그럴 수 있을까. 이 모두가 ‘현대판 용의 눈물’이 갖는 전근대성에서 비롯된 일이다.

신재민 주간한국부 부장 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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