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잡히기만 해봐라!”

한때 대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길거리의 ‘양대 무법자’중 하나인 택시(나머지 하나는 오토바이)기사도 못말리는 상대가 하나 있었다. 직업은 프로야구 선수. 이름만 대면 다들 알만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마운드가 아니라 한밤중 도로에서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다. 익히 ‘바퀴 달린 노래방’으로 소문난 승용차(노래반주기를 장착했다)를 몰고 다니며 차안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대는 건 본인 소관이라 치더라도, 어쩌다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는 택시가 나타났다 하면 경광등(불법으로 단 것)을 깜빡이며 마치 경찰순찰차처럼 경고방송까지 하는데야, 멋 모르고 그에게 당한 택시기사가 한둘이 아니다.

작전인지 어떤지, 노래를 부를 때도 남들이 쉬 마이크를 뺏을수 없는 메들리류만 골라 부른다. 최고의 애창곡은 ‘삼태기 메들리’. 무려 108곡 접속에 40분간 불러야 하는 이 노래만 시작되면 좌중은 더이상 저항을 포기한다. 술도 한번 마셨다하면 끝장을 봐야 잔을 놓는 이 야구선수, 바로 한희민(38)이다.


은퇴한지 4년, 대전 외곽에‘난초마을’마련

은퇴한지 4년째. 한때는 프로야구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없어도 지구는 여전히 돌고 프로야구계도 끄떡없이 굴러가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평소의 모습대로라면 은퇴후 최소한 노래방 하나는 확보했을 법한 이 남자는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초야의 은둔자처럼 고요히 살아가고 있다. 대전시 방현동의 외곽도로 한켠에 난(蘭) 전시판매장인 ‘난초마을’을 마련, 난향(蘭香)에 묻혀 살고 있다. 그가 과연 그럴수 있을까.

“옛날에 돈 벌었던거, 인기, 그런거 생각하면 이렇게는 못 삽니다. 하지만 내가 원래 손으로 만지는 일을 좋아하는데다 회사생활을 할 성격도 못돼요. 어디 얽매이는건 딱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이 일이 더욱 제게 맞아요. 목부작(木附作)은 6년전 아는 형으로부터 배웠어요. 작년엔 꽤 많이 만들고 많이 팔았는데 올해는 작년같지 않네요. 주로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한가지 좋은 건 목부작은 오히려 묵으면 묵을수록 더 좋다는 거예요.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더 모양이 잡혀서 값이 높아지거든요.”

목부작은 죽은 괴목에다 난을 붙여 만드는 것. 접목 중에서도 워낙 까다로운 일이라 이 분야의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외에도 돌과 난을 접목시키는 석부작(石附作)을 다루긴 하지만 목부작에 훨씬 마음이 기울어 있다.

이 일을 가르쳐 준 그의 ‘사부’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부가 생전에 주고 간, 주목으로 된 목부작은 그가 아끼는 유일한 ‘비매품’. ‘한희민이 목부작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 일대에는 목부작을 시작하는 사람이 덩달아 늘었다.


죽어있는 나무에 생명 불어넣는 매력적인 일

“정말 재미있어요. 아침부터 자정까지 이것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지루한 줄을 몰라요. 완전히 내 생각대로 연출할 수 있거든요. 난도 붙이는 곳이 따로 있어서, 엉뚱한데 붙이면 나무도 죽고 난도 죽어요. 그렇게 죽어있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란 게 가장 큰 매력이죠.”

거의 목부작계의 ‘가위손’쯤 돼 보인다. 대작을 좋아한다는 그의 등 뒤로 선 작품이 인상적이다. 물푸레나무, 주목, 소나무, 아카시아 괴목에 풍란이나 지네발난 등을 붙여 만든 것들, 조각작품처럼 아름답다.

원래부터 뭐든 손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하던 그의 성미엔 더 할 나위 없이 짝이 맞는 일거리다. 지금도 그가 쓰는 의자며 생활집기 대부분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재료도 대부분 재활용품이다. 방금 전에도 다 쓰고남은 케이블 보관용 나무짝으로 원탁을 만들던 중이었다.

자신의 직장이었던 한국화약에서 구한 빈 탄약박스는 특히 다용도. 숙소로 쓰는 비닐하우스의 마룻바닥도 이것으로 깔았고, 심지어 그가 기르는 개집에도 탄약상자의 고유번호가 찍혔다. 가건물 두 채 중 한 채도 직접 지었다. 인부를 사서 숙소용 비닐하우스를 지을 때 어깨 너머로 익힌 솜씨로 혼자 온실 하나를 세웠다.

이름은 ‘난초마을’이지만 사람이라곤 단 혼자다. 이곳에 딸린 식구라곤 개 네마리가 전부. 하루종일 마당과 집, 작업장 사이를 오가며 혼자 바쁘다. 아침에 눈 뜨면 난초 100여분의 물을 주는 일부터 시작해 식사며 청소며 빨래, 개밥 주는 일까지 혼자서 해결한다. 접 붙일 나무를 구하기위해 산을 찾는 날이 아니면 대개는 그렇다. 전직 운동선수라곤 하지만 흔한 조깅 한번 안한다. 굳이 그리 하지 않아도 종일 땀 흘릴 일 뿐이다.

산을 오르는 일이 많을 땐 1주일에 다섯 번. 한나절에 최소한 산 서너개를 넘는다. 빈 몸으로 움직이는 산행도 아니다. 괴목을 구할 때마다 짐이 불어나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10㎙씩 간격을 두고 산아래로 옮겨오는 꾀도 얻었다. 힘들게 구한 괴목을 이고지고 내려와 산 아래의 차에 옮겨 싣는 순간, 그때부턴 가슴이 떨린다. 한번 산행이 시작되면 좋은 물건을 얻었을때의 기분은 어디 비할 바가 아니다.


야구 잊었지만 마운드 여운은 여전

요즘은 특히 바쁠 때다. 얼마전 한 스포츠신문에 쓰던 야구칼럼을 비롯해 야구에 관련된 일은 대부분 손을 뗀 지금, 유일하게도 한 고교의 야구감독으로 있는 절친한 후배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해 최근에도 순천에서 7개월간 야구지도를 맡기도 했다. 그동안 부친에게 온실을 맡겨두었다가 돌아온지 2주째. 썰렁해진 전시장을 새 작품으로 채울 일이 급하다.

현재 체중 77kg. 곧 산에 오르면 5~6kg 빠지는 것도 금새다. 건강만큼은 하루볕이 다름을 실감한다. “예전 선수시절엔 추위라곤 몰랐는데 이젠 반소매 옷을 입으면 좀 으슬으슬해요. 이 일을 하면서 다른 건 모두 강해졌는데 몸만은 약해졌어요.”

온실 건너편 숙소용 가건물은 그가 꾸민 ‘고물 천국’이다. 5원짜리 동전투입기가 달린 옛날 공중전화에서부터 외삼촌댁에서 얻어왔다는 낡은 나무 이발의자, 시골을 돌아다니는 길에 발견한 재래식 나무문짝, 재봉틀, 풍금, 망태기, 또 시골장터를 뒤져 사왔다는 새우젓 단지와 술단지 등이 마루 가장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석’을 차지한 것은 투수 시절의 대형 사진과 트로피다. 아무리 생활이 변했어도 그 시절의 여운은 여전히 그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24년이나 야구를 하던 사람이 왜 지금 그쪽 일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하면 마음 아프죠. 하지만 지나간 일을 자꾸 돌이켜봐야 마음만 괴로운 것이고, 어쨌든 이젠 이게 내 일이쟎아요. 그럴만한 기회가 온다면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고 다만 지금은 이 일이 좋을 뿐 다른 생각은 전혀 없다는거예요.”

충북 영동 황간 출신인 그는 이미 초등학교때 키가 174cm로 커버린 장신이었다. 초등학교 농구반에서 2년을 보낸 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가 다닌 학교엔 농구반이 없어 부득이 종목을 바꾼 것이 야구였다.

그후 중고교시절 소년체전 우승, 대붕기 우승과 준우승 등, 그후 성균관대와 국가대표를 거쳐 현재 한화로 이름을 바꾼 빙그레 이글스 팀에 입단하기까지 줄곧 막힘없이 올라갔다.

프로야구의 대표적 잠수함 투수로도 맹활약을 벌였던 그는 프로시절에도 그다지 슬럼프란 것을 몰랐다. 있어봐야 목청껏 몇시간이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대면 마음의 중압감은 씻은 듯 사라졌다. 사실상 성적 자체도 계속 오르막이었으니 불안할게 무엇 있었으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간은 한희민 최고의 해였다.

1988년 16승 5패, 1989년 16승 4패, 당시 야구선수로선 최고의 주가였다. ‘면도칼 컨트롤’로도 유명했던 그는 자신의 몸관리에도 철저했다. 투수의 생명인 어깨를 보호하겠다며 한여름에도 항상 긴소매 옷을 입고 다녔고 자동차 에어콘 한번 틀어본 일이 없다. 1993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 그 직후 대만 프로야구 준꿔베어스로 진출해 2년간 활동한 그는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시점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8년간의 성적 80승 51패 24세이브, 방어율 3.25에서 기록이 멈췄다.


대만서 선수생활마감, 아쉬움 남아

“제일 고통스러웠던 건 삼성에서 나와 대만에 갔을 때예요. 요즘도 종종 ‘그때 대만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어요. 당시 삼성에선 중간 릴리프를 하라고 하지, 내 목표가 그때 100승이었는데 갑자기 릴리프를 하라니 마음과 몸에 다 병이 생겼을 때죠. 그렇게 2군에 있다가 우연찮게 이야기가 돼서 대만에 갔는데 거기선 크게 성적이 좋지도 못했어요. 우선 기후가 안 맞아요.

나는 체질적으로 봄, 가을이나 나이트게임 같이 다소 쌀쌀한 기온에서 성적이 올라가거든요. 여름엔 좋은 성적이 나온 때가 거의 없어요. 귀국한 것도 다시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싶어 돌아온 건데 막상 성적이나 체력 문제도 아니고,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를 당했을 땐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 심정이야 말로 다 못하죠. 계속 혼자 산을 오르면서 마음을 돌리고, 그렇게 극복했어요. 1996년말 사실상 은퇴한거죠.”

잠시 야구교실을 열었던 일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야구교실마저 차라리 하지 않고 곧장 왔었어야 옳았다고 생각할만큼 현재의 삶에 깊은 애정이 붙었다. 그간 벌어놓은 돈? “많죠! 다 여기, 내 뱃속에! (웃음)” 야구생활 24년 끝에 남은 재산은 대전에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 한 채가 전부.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지금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다. 하지만 마음은 이만큼 편할 수가 없다.

선수 시절이 남긴 훈장이 하나 더 있긴 하다. 1991년 인대가 손상되는 심한 다리부상으로 8개월간 병원신세를 진 적이 있다. 당시 수술도 사양한 채 물리치료로만 버틴 그는 그 와중에도 큰 게임만 있으면 아픈 다리를 이끌고 마운드에 나섰다. 그 후유증으로, 더이상 야구선수가 아닌 요즘도 비가 오면 다쳤던 다리가 아프다.

낮에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톨이지만 외로와 할 겨를도 없다. 게다가 밤이면 술친구가 줄을 잇는 그다. 과거 선수시절에도 소문났던 두주불사파. 요즘은 술을 많이 줄인 것이 소주 2병이다. 간간이 들르는 몇몇 야구인을 빼고는 대개가 야구와는 무관한 술친구다. 오겠다는 이들에게 그는 ‘아예 PET병으로 사오라’고 말한다. 워낙 외진 곳이라 소주병이 쌓이는 것도 처치곤란이기 때문이다.


개 네마리에게도 외로움 묻어나는 생활

가능하다면 조만간 이사할 계획도 갖고 있다. 대전 근교나 고향 어딘가쯤 땅 1,000평에 집과 난초 전시장 외에도 전통가마가 있는 도예 작업장까지 직접 짓고 살 계획이다. 그 설계도까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다 그려져있다.

이야기가 끝난 뒤 그는 문밖까지 배웅을 나와서는 “늦지 않으면 함께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좋을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애주가의 인사법은 어디가나 똑같을까? 마음이 훈훈했다. 처음엔 그리도 사납던 개들이 웬일로 조용했다.

하긴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내가 몰래 혼을 내주러 간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털갈이중인지 불편한 모습에다 ‘인생이 불쌍해’ 몇번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금새 꼬리를 내렸다. 어지간히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개 네마리의 주인은 찾아오는 객만 없으면 개고 뭐고 온통 다 잊고 종일 온실에만 틀어박혀 지네발난만 들여다보는게 틀림없었다. 뭔가 한가지 일에 미친 사람은 그래서 주윗사람만 더 외로운 법이다.

정영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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