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스스로의 전통 문물에 ‘와’(和)를 붙여 부른다. 일본옷은 ‘와후쿠’(和服), 다타미(疊)가 깔린 일본식 방은 ‘와시쓰’(和室), 일본 음식은 ‘와쇼쿠’(和食)라고 한다. 닥종이는 ‘와시’(和紙), 일본식 과자는 ‘와가시’(和菓子)고 일반적으로 일본식 또는 일본풍을 나타낼 때는 ‘와후’(和風)라고 한다. 일본 동양화를 ‘니혼카’(日本畵), 청주를 ‘니혼슈’(日本酒)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한국화’‘한방’(韓方) 등과 마찬가지로 그 역사가 길지 않다.

화(和)의 사전적 의미는 온화, 조화, 화목, 평화, 어울림, 따스함 등과 통한다. 또 ‘중용’(中庸)을 ‘희로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절위지화’(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라고 정의했듯 동양 사상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뜻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지 않은 것이 ‘중’이고 그런 감정이 일어도 절도가 있어 넘치지 않는 것이 ‘화’란 뜻이니 개인 차원에서는 정서적 조화, 사회적으로는 질서와 화합을 가리킨다.

이 고도의 추상적 개념을 끌어들여 일본은 바깥 세계와 스스로를 구분했다. 일본인은 ‘와’를 전통의 으뜸으로 친다. 쇼토쿠(聖德·574~622년)태자의 ‘17조 헌법’은 ‘화를 가장 소중히 여기라’를 1조로 삼았다. 당시 호족들의 치열한 권력 투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와’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확인시킨다.

현재 일본에서는 ‘와’가 정치 지도자의 최상의 덕목으로 꼽힌다. 일본식 경영의 핵심인 연공서열이나 종신고용도 ‘와’의 정신에 기초한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와’가 처음부터 이런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쓰인 것은 아니다.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일본을 ‘왜’(倭)로 가리켰다. 이는 ‘키가 작다’‘추하다’‘외지다’ 등의 부정적인 의미이며 ‘유순하다’ 가 유일하게 긍정적인 뜻이다. 일본 열도의 사람들이 이런 나쁜 뜻으로 자신을 불렀을 리가 없다.

더욱이 당시는 한자가 전래되기 전이어서 ‘왜’는 어디까지나 중국인의 작품이다. 소리 글자가 아닌 한자로 새 문물을 나타날 때 중국인은 비슷한 발음에 새로운 뜻을 부여한 한자를 사용한다. 코카콜라를 ‘커커우컬러’(可口可樂)라고 하는 식이다. 일본 열도의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지역을 전혀 다른 의미에서 ‘와’라고 한 것을 중국인이 멸시의 기분을 섞어 발음이 닮은 ‘왜’로 썼을 것이다. ‘倭’의 일본음은 ‘와’이며 중국 고음은 ‘워·와’에 가까웠다.

처음 중국인과 접촉한 일본 열도 사람들은 무엇을 일러 ‘와’라고 했을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와’(環)다. 둥근 고리나 바퀴도 ‘와’(輪)라고 하듯 일본어의 ‘와’는 둥글고 가운데가 빈 것을 가리킨다. 한서, 후한서 시대는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와 겹친다.

최대 유적인 규슈(九州) 사가(佐賀)현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이 보여주는 당시 일본의 집락은 외적을 막기 위한 둥근 호(濠)로 에워싸였다. 이 환호(環濠) 집락이 ‘와’였다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국가 개념이 싹트기 전까지 ‘와’는 보통명사인 동시에 자신의 집단·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명사로 쓰는 ‘나라’라는 말이 과거 고유명사로도 쓰인 흔적은 한반도계 도래인들이 일본에 ‘나라’(奈良)라는 지명을 남긴 데서도 드러난다.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는 나라현 일대의 지명 그대로 ‘야마토’로 불렸다. 한자로는 ‘倭’로 표기했다가 나중에 ‘和’로 바꾸었다. 여기에 ‘크다’는 뜻의 ‘大’를 붙여 ‘오-야마토’로 읽다가 지금은 ‘야마토’로 읽는다. 이 ‘야마토’의 ‘다이와’(大和)는 구체성도 띠고 있다. 당시까지의 소국, 즉 ‘와’(環)보다 훨씬 규모와 세력이 컸음을 뜻하는 동시에 수많은 ‘와’를 묶은 연맹체, 즉 부족연맹체임을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 전통의 핵심이라는 ‘와’(和)의 원형을 동족집단 ‘와’(環)에서 찾는다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본 사회의 지방분권적 성격도 저절로 이해된다.

황영식·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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