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찻그릇의 고향을 찾아 역사기행을 하면서 그 첫번째가 왜 하필이면 전남 무안땅이냐고 의아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아니고 한낱 감상적인 역사기행 차원도 결코 아니다.

오직 남도 찻그릇의 역사적 기원과 조선조 사기 장인의 독특한 ‘그늘의 한(恨)’이 삭혀져서 중세 한일 도자 교류사에 빼놓을 수 없는, 무안 찻그릇이란 불멸의 도자기 문화를 탄생시킨 곳이 곧 무안지방이기 때문이다.

영산강 350리 물길은 우리 선조 사기 장인의 슬픈 사연을 따라 남도의 애환을 감싸돌며 나주(羅州) 곡강(曲江)에 들어가면서 무안군(務安郡) 상몽탄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꿈여울나루(夢灘)를 휘돌아 영산호로 흘러 들어간다.

무안은 고대로부터 유서깊은 사찰이 있어 차향(茶香)이 끊이질 않아서 차(茶)와 인연이 깊은 곳. 몽탄면 달산리 승달산(僧達山) 법천사(法泉寺)와 대치리의 총지사(總持寺)는 신라 성덕왕 때 인도의 정명법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지금은 폐사지(廢寺址)가 되었지만 절 어귀에 서있는, 남도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을 한 돌장승은 세상살이에 지친 고단한 길손들을 편안하게 맞이 해준다.

근세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중흥조(中興祖)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草衣· 1786∼1866)선사의 출생지도 이곳 무안군(務安郡) 삼향면(三鄕面) 왕산리(旺山里) 샛터(新基)다. 지금은 무안군에서 초의선사 생가를 복원하여 선사의 차정신(茶精神)을 오늘날에 기리고 있다. <계속>

* 연재를 시작하면서

14세기말부터 16세기말까지 산자수명하고 인정많은 남도지방의 도요(陶窯)에서 무명 사기장인(無名沙器匠人)의 무상(無想)과 무욕(無慾)의 심성(心性)에 의해 빚어진 이른바 남도 막사발은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 차인(茶人)들에 의해 그 미(美)가 발견되었고 그 후 현해탄을 건너가 고려차완(高麗茶碗)이라 이름지어져 집권 무사계층사이에 널리 진중(珍重)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호전적이며 피비린내나는 무사들의 도륙(屠戮)의 상징인 칼의 문화에서 평화지향적인 흙의 문화로 서서히 그 문화유형이 바뀌게 된다.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보잘 것 없는 조선의 남도 막사발이 중세 일본 정신문화와 차도(茶道)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필자가 500년에 걸친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본격적으로 이 방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한국일보사와 고 장강재회장의 지원과 격려 때문이었다. 남도지방의 옛 도요지를 200군데 이상 답사,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다보니 화살같은 세월은 어느덧 20년이 흘러가 버렸다.

500년의 시공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조선 찻그릇의 비밀과 그 고향을 찾아나선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중세 한일 문화교류사의 중요한 부분인 ‘세라믹 로드’의 대탐험이었다.

일본 큐슈(九州)지방과 오사카(大阪) 사카이(堺) 지방의 박물관, 유물창고를 뒤지는 것은 물론이었고 비록 일본땅 이지만 조선 사기장인의 후예들 도방에서 조선 찻그릇의 잔영을 만나보기 수십 차례, 그 사이 많은 동호인이 찻그릇 역사기행을 연재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필자의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라는 문화적인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주간한국’의 지면을 빌어 이제서야 그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현암 최정간·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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