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앞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빠져나가 구름다리를 바로 건너면 금화터널이 이어진다. 이 금화터널을 빠지면 바로 오른쪽 안산 기슭에 봉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부터 110년전 봉원사에 이동인(李東仁)이라는 비범한 중이 살았다.

그는 초대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花房)의 조선말 통역관 풍현철(風玄哲)이라는 일본 중과 친하게 지냈다.

이동인은 그로부터 일본말을 배워 일본책을 읽을 수 있었다. 때로는 봉원사에서 안산 줄기를 넘어 서대문밖 천연정(天然亭)에 자리잡은 일본 공사관에 드나들며 일본의 개화 사조와 문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 공사관 주선으로 고종 14년에 일본 유람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돌아올 때 램프 석유 성냥 직물 등 각종 양품과 잡화 같은 개화상품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일본 개화사상의 지도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개화사상과 내외정세를 소상히 듣고 왔다.

이 신기한 개화문물은 당시 서울의 상류사회에서 화제가 되었다. 드디어는 고종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들어가 이동인은 부름을 받고 임금 앞에서 성냥불을 켜 물처럼 보이는 석유에 불을 붙여 보이기도 했다.

한편 당시 청계천에서 개화사회 개조론을 펴고 있던 유홍기(劉鴻基)란 거사(居士)가 불교신자인 것을 기화로 두 사람은 서로 교유함으로써, 유 거사를 스승으로 삼고 있던 개화 운동의 선구자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 이같이 하여 이동인이 자리잡고 있는 봉원사는 개화파 인사의 집결지가 되어 개화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개화파 인사 서재필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의 외숙인 김성근의 친척이란 연분으로 연상의 김옥균의 알게 되고 김옥균을 통해 서광범, 박영효 등을 알게 되었다 한다. 이동인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에 맛들인 김옥균, 박영효 등 열두명으로 이뤄진 관신(官神)의 일본 시찰이 이뤄졌고 개화문물을 수입, 관장하는 기무아문(機務衙門)이란 기구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이동인이 이 기구의 참모로 일하던 어느날 세도가 민씨 가문의 핵심인물인 재동대감 민영익의 사랑채인 연당에서 나온 것을 최후로 이동인은 행방불명된다. 수구파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당시에는 중을 매우 업신여기던 때라 사대문 안을 이동인이 마구 드나들며, 심지어는 왕실과 대감댁을 오감으로써 수구파의 시기를 샀음직하다.

봉원사가 한국 개화사상의 온상이요, 요람이란 것 이외에 또하나 흥미있는 사실은 이 절의 큰 방 건물이 바로 구한말의 밀려드는 개화 물결에 맞서 쇄국정책을 폈던 풍운아 흥선 대원군의 공덕동 별장 아소정(我笑亭)을 옮겨다 지었다는 사실이다. 곧, 대원군의 체취와 손때가 묻은 이 봉원사의 큰 방은 구한말의 풍운을 그대로 대변해 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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