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야한 영화'

2000 04/05(수) 12:51

음침한 여관방 조명 아래에 맨몸으로 뒤엉켜 있는 남녀 배우. 삐걱거리는 침대 스프링 소리에 뒤섞인 노골적이면서도 작위적인 젊은 여자의 신음 소리. 여기에 개연성없는 스토리 전개와 유치하기까지 한 작품 제목까지…. 소위 성인물이라고 하는 국내 에로 비디오의 현 수준이다.

유치하기까지 한 국내 성인 영화·비디오 시장에 일대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본래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16㎜ 영화라고 하면 ‘성인 전용 비디오’라는 인식이 박혔을 정도로 주로 에로 영화만을 다뤘던 분야. 엉성한 시나리오와 조악한 화질,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 등 저급한 내용으로 여관같은 하급 숙박 시설에서만 유통돼왔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관심이 떨어져 IMF 위기를 전후해서는 일부 음란물 마니아 사이에서만 유통돼왔다.


인터넷 접속 건수, 에로물이 압도적

사그라져가던 16㎜ 성인 영화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예상치 않게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전달 매체의 등장이었다. 인터넷은 우선 국내 영화계와 비디오계에 유통 혁신을 몰고왔다. 그동안의 ‘개봉관 상영→6개월뒤 비디오 출시→1년뒤 케이블이나 공중파 TV 상영’이라는 기존의 필름 유통 질서가 순식간에 와해됐다.

극장 개봉과 동시에 온라인상에서 영화 감상이 가능해졌고 6개월을 기다림없이 바로 개봉관 상영 작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동네 비디오샵까지 가야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서도 안방에서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가장 큰 매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 의식의 잔재가 뿌리깊은 우리 정서상 낮뜨거운 성인 영화는 공개된 극장보다 혼자 몰래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인터넷 영화 사이트가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35㎜ 극장 개봉작 90여편과 16㎜ 에로 영화 10편의 조회 횟수를 분석한 결과 1위를 차지한 ‘쉬리’를 제외하고 2~11위를 모두 에로 영화가 차지했다. ‘유리의 순결 상실’, ‘몽정’과 같은 16㎜ 영화가 온라인상에서는 ‘박하사탕’, ‘주유소 습격사건’같은 개봉관 히트작을 앞서고 있는 것이다.

올해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세계 각국의 영화 제작자, 배급업자 등 800여명의 영화인이 모인 가운데 열린 세계 3대 영화 마켓인 ‘아메리칸 필름마켓’(AFM)에서도 ‘인터넷과 전자상거래가 영화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이 오갔다.

당시 세계 각국 영화계의 유력 인사들은 한결같이 “인터넷은 앞으로 전세계 비디오 시장을 완전 대체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전시회에 참관했던 인터넷무비픽처스㈜의 김창호 영화사업부PD는 “1980년대초 보급된 VHS는 영화 팬들을 잠식하지 않고 오히려 비디오 소비 계층이라는 또다른 시장을 만들어내 결과적으로 영화 제작 환경에 많은 도움을 줬다”며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은 조만간 홈비디오 시장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는데 각국 영화인이 동의했다. 특히 16㎜ 영화의 경우 이런 현상은 더욱 빨리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거대 인터넷 기업도 성인영화시장에 군침

지난해부터 국내에서는 인터넷 영화 사업이 21세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면서 각종 인터넷 영화 전문 사이트도 무더기로 생겨났다. 현재 국내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화를 취급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무려 180여개에 달한다.

이중에서 16㎜ 성인 영화를 다루는 곳은 서울영상사업단의 야색(yasec.com), 씨네로닷컴의 에로파크(eropark.com), 인터넷무비픽처스의 마구리(maguri.com), 아이시네(icine.com), 웹시네마(webcinema.com) 등 10여개에 이른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중소 벤처기업 외에 드림라인, 하나로통신, 두루넷 등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까지 성인 영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피말리는 경쟁을 펼치고 있다.

국내 인터넷 시장의 자체 발전도 인터넷 영화가 붐을 이루는데 한몫 했다. 지난해 중반부터 인터넷 벤처기업이 무더기로 양산되면서 서비스 분야에 있는 인터넷 업체사이에서 콘텐츠 확보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각 사이트마다 네티즌을 끌어모으기 위해 영화 전문 사이트와의 전략적 제휴를 추진했다. 영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콘텐츠여서 인터넷 업체로써는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포털사이트를 지향한다는 웬만한 인터넷 사이트 치고 영화 전문 사이트와 링크가 돼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다.

이같은 국내의 인터넷 영화 열기는 다소 일방적인 면이 없지 않다. 아직 영화 팬들은 그게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인터넷 업체만 너무 앞서가고 있는 형국이다. 국내 영화사이트 수는 인터넷 선진국인 미국보다도 많을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아직 외국에서는 영화사간의 판권 문제와 화면 전송 등 기술상의 문제 때문에 그리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국내에서만 지난해말부터 갑작스런 이상 열기로 공급 과잉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씨네로닷컴의 주경섭 사장은 “인터넷 영화 시장은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분야다. 그러나 경쟁력이 있는 외화의 경우 제작사와의 판권 문제 때문에 인터넷 상영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적은 비용으로 판권을 인수할 수 있는 국내 16㎜ 성인 영화시장이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디지털세계의 또다른 문화

물론 이런 인터넷 영화 열기는 열악했던 16㎜ 성인 영화시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본력과 기획력을 갖춘 인터넷 사이트들이 직접 제작에 뛰어들거나 제작비를 지원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작품의 질이 향상되고 있다. 척박했던 땅에 ‘자양분’(자금)이 뿌려지면서 이 시장이 최근 들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충무로에서 밀려난 2류급들이 감독에서 시나리오 구성, 촬영까지 혼자 담당했던 기존의 주먹구구식 제작에서 벗어나 점차 실력있는 감독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소풍’제작에 참여했던 박선욱 감독, TV 등 50여편의 CF를 만들었던 봉만대 감독과 같은 실력파가 나타나고 있다. 또 지난달에는 제1회 에로영화제가 실시됐고 내달에는 에로 배우 선발대회도 열리는등 에로 영화와 관련된 각종 이벤트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화질이 떨어진다는 것. 일반 네티즌의 경우 기간망 사업자의 초고속통신망(ADSL)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전송 속도가 최소 0에서 1,500Kbps로 대역폭이 너무 심해 화면이 단절되는 듯한 ‘버퍼링(buffering) 현상’이 발생하거나 종종 연결 자체가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다소 안정성이 있다는 전용선도 400~600Kbps로 속도가 느려 영화나 비디오 같은 동화면에 비해 화질이 다소 떨어진다. 물론 기술상의 문제는 머지않은 시간에 해결될 전망이다.

디지털과 에로. 언뜻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디지털 세계에 또다른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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