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확실한 승리다.” 3월28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석유장관 회담에서 9개 회원국이 지난해 3월 합의한 원유 감산분을 회복, 원유를 6.3%(하루 145만2,000 배럴) 증산키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세계 원유시장의 관계자들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올 연말 대선을 앞두고 가솔린과 난방유 가격 급등이라는 악재를 해소하기 위해 빌 리처드슨 에너지장관을 중동 산유국에 보내 총력을 기울였기에 이런 평가는 당연한 것이다. OPEC의 원유 증산결정이 미국내 유가 안정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성과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정치적 승리로 비쳐지고 있다.

특히 앨 고어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나설 가능성이 있는 리처드슨 장관에게는 OPEC의 증산 결정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승리’는 지금까지 ‘회원국 만장일치 결정’이라는 관례를 지켜온 OPEC이 이번 논의과정에서 끝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한 이란을 제껴놓은 채 합의문을 발표한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OPEC내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 170만 배럴 증산을 주장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리 알-누아이미 석유장관은 합의문 발표직후 “미국의 압력이 OPEC의 증산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했지만 이 말을 믿는 시장 관계자는 없는 듯하다.


끝까지 버틴 이란, 경제적실리도 챙겨

이번 회담에서 “하루 120만 배럴 수준이면 충분하다”면서 170만 배럴 증산을 주장한 사우디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OPEC의 2대 산유국 이란이 내건 명분도 ‘미국의 입김’에 결국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잔 남다르 잔게네 이란 석유장관은 “OPEC은 (미국에 의해) 이미 내려진 결정을 추인하는 ‘고무도장’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원칙이다”라면서 “이번 각료회담이 합의에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란도 이번 회담에서 손해를 본 것만은 아니다. 우선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선 안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이슬람 국가 사이에서 선명성을 과시했으며 OPEC 합의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수준으로 석유생산량을 늘리겠다고 발표, 경제적 실리도 함께 챙겼다.

잔게네 이란 석유장관은 OPEC 합의발표 하루 뒤인 29일 테헤란 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4월1일부터 국익 보호를 위해 원유 생산량을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이 끝까지 합의에 반대한 데는 온건파인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이슬람 강경파에게 공격 구실을 주지 않으려는 고려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이란의 원유 시설이 낡아 대폭적인 원유 증산을 수용할 수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이번 협상을 이끈 사우디아라비아는 만족할 만한 쿼터를 확보했다. 결국 이번 OPEC 증산 결정 과정에 관여한 국가들은 나름대로 모두 승리를 거둔 셈이다.


고유가, 산유국·소비국 모두에게 피해

이같이 OPEC의 증산 결정은 미국의 증산압력을 배경으로 각국간의 이해관계가 조율되는 정치적인 절충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배럴당 25달러가 넘는 고유가가 산유국과 소비국 모두에게 도움이 안되며 경제위기에서 회복되고 있는 아시아 및 중남미를 비롯한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인식을 산유국이 공유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다면 향후 국제유가가 충분히 안정될 수 있을까. 하루 145만 배럴이라는 증산량은 미국이 요구해온 하루 200만~250만 배럴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다. 분석가들은 일단 이번 합의에 반대했던 이란의 증산분까지 포함해도 증산 규모가 하루 170만배럴에 불과, 원유가격이 소비국이 원하는만큼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OPEC 합의이후 유가가 하락했지만 중장기적인 유가 추이는 아직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국제원유가는 지난해 3월 이전 배럴당 10달러 이하였으나 OPEC 감산 결정이후 상승하기 시작, 이달초에는 3배가 넘는 34달러까지 올랐었다.

런던 국제에너지문제연구소의 레오 드롤레스 부소장은 “시장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이번 증산 규모로는 유가를 배럴당 20-21달러 수준까지 끌어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OPEC 회원국이 비공식적이지만 이미 하루 100만 배럴을 추가생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증산 규모는 하루 70만 배럴에 불과하다”면서 “이번 결정에 대한 미국의 환영은 단지 ‘외교적인 수사’에 불과하며 OPEC은 오는 6월회의 때 또다시 미국으로부터 증산 압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같은 부정적 입장에 대해 리처드슨 미 에너지장관은 “OPEC에 이어 비(非)OPEC 회원국들이 원유 증산에 합류, 하루 생산량이 280만 배럴 규모로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비OPEC 산유국인 멕시코는 OPEC 합의 하루 뒤인 29일 4월1일부터 하루 원유 생산량을 15만 배럴씩 증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마틴 베일리 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OPEC 증산 결정으로 유가가 올 연말까지 배럴당 24달러선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과의 줄다리기 계속될 전망

OPEC은 오는 6월21일 다시 회의를 열고 7월1일부터 적용될 석유 생산 쿼터를 재검토할 방침이다. 사우디의 알-누아이미 석유장관은 6월 회의에 대해 “이는 유가가 하락할 경우의 감산 검토 뿐 아니라 유가가 오를 경우 추가 증산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쿠웨이트의 사우드 나세르 알-사바 석유장관은 “OPEC이 목표로 삼고있는 배럴당 원유가격은 23달러에서 25달러 사이라면서 만약 이번 증산 결정이 유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면 합의내용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번주에도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을 중동에 파견,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연합(UAE)등에 증산 결정을 확실히 실행하도록 압력을 계속할 계획이어서 원유 증산을 둘러싼 미국과 산유국의 줄다리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남경욱 ·국제부기자


남경욱 ·국제부 kwn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