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진 사장이 ‘한글과 컴퓨터’(한컴)를 살리기 위해 취한 첫 조치는 조직개편이었다. ‘아래아 한글’을 개발하는 핵심 기술인력은 1997년 하반기부터 하나둘씩 빠져나가 전 사장이 들어왔을 즈음에는 겨우 30%가량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이미 판을 거두기 시작한 시골장터처럼 썰렁한 분위기였다.

“조직을 추스리고,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가장 급했어요. 한컴서비스와 같은 자회사 조직을 끌어와 마케팅 분야의 전위조직으로 삼고 직원들에게 기술개발 못지 않게 마케팅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지요.”

그러나 곧 제동이 걸렸다. 기술력에 관한 한 국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기존의 기술인력은 마케팅 중심의 회사운영 방침에 소외감에 느꼈던지 전 사장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사회도 전 사장이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인터넷 서비스 분야 진출을 ‘기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의 강점과 경험을 너무 무시했다’는 이유로 승인을 보류했다. 그때 전 사장은 ‘큰 물’에서 놀기 위해서는 균형잡힌 비전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구호가 지금까지 한컴을 지탱하고 있는 ‘한글에서 인터넷까지’다.


다리품 팔며 신·구 멤버 융합 이끌어

전하진 사장은 젊었을 때부터 사업감각에는 남보다 빨랐던 편이었다. 인하대 산업공학과에 들어간지 1년만에 대학가에 영어회화 붐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친구를 꼬드겨 ‘미인(美人)회화’라는 학원을 차렸다.

미국인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는 이 학원이 히트를 치면서 학생으로서는 상당한 거금을 만졌다. “국민학교 2학년때 부모님이 이혼한 뒤 배다른 형제 속에서 나름대로 생존방법을 터득한 탓인지 남보다는 좀 빠르다”고 속을 털어놓는 그는 한컴에서도 특유의 ‘적과의 동침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가 동원한 것은 우선 튼튼한 다리와 입이었다. 기존 멤버와 새 멤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직원과의 호흡일치가 중요하다고 느낀 전 사장은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기 시작했다. 각 부서별로 돌아가며 함께 고민하고, 격의없이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서는 2차, 3차, 심지어는 젊은 세대의 해방구라던 록카페까지 따라다녔다. 그리곤 다음날 아침 일찍 조찬회의를 주재했다

. 그러나 그도 역시 사람인지라 때로는 혼이 빠질 때도 없지 않았다. 어느날 회의에 참석했더니 한 직원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사장님, 오늘 무슨 날이예요?” “아니, 왜요?” “시계를 두 개나 끼고 오셔서.”

그제사 오른팔에도 시계가 걸려 있는 것을 알고서는 “아 이거, 내 정신 좀 봐. 한컴에서는 전에 만졌던 돈에 0이 하나 더 붙어다니니까, 정신이 없어요. 여러분이 제 몫까지 챙겨주셔야 합니다”라고 받아넘겼다. 자칫하면 직원에게 꼬투리를 잡힐 만한 순간을 즉흥적인 위트로 넘기는 순발력을 그는 갖고 있었다.

한컴의 한 차장급 직원은 전 사장의 그런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멋쟁이 사장님이죠. ‘70년대 학번’은 통기타에 생맥주, 팝송 세대 아닙니까. 사장님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농담도 잘 하세요. ‘사오정 시리즈’의 최신 버전을 갖고와 웃긴다니까요.”


현장에서 뛰는 사람이 최고 전문가

그의 입은 농담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끊임없이 사원과 접촉하면서 ‘축구 감독론’을 펼쳤다. “축구는 11명의 선수가 하는 겁니다. 감독이 공을 차는 게 아니지요. 사장은 상대를 이길 전략을 짜는 감독일 뿐입니다. 이기고 지는 건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에게 달렸어요.

그런데 그라운드에 선 선수가 공이 날아오는데 감독 얼굴이나 쳐다보면 되겠어요. 무조건 공을 차야 합니다. 공을 잘못 처리할 수도 있지만 공을 피한다면 그 선수는 바꿀 수밖에 없지요.”‘축구감독론’의 핵심은 현장을 뛰는 사람이 최고의 전문가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남의 눈치를 보기 전에 스스로 실력을 키우고, 발휘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조직개편과 함께 도입된 전자결재 시스템이, 부서간의 벽을 뛰어넘는 내부정보전달체제(인트라넷)인 ‘노트’(notes)가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같은 ‘마인드 콘트롤’도 상당히 작용한 탓으로 보인다. ‘노트’를 이용하면 신입사원도 업무에 적응하는데 2~3일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노트’에는 없는 정보가 없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전 사장은 즉석에서 직접 시연을 해보였다. ID를 입력하고 들어가면 각 부서별, 개인별로 하고 있는 업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창이 있고, 회사의 재무상태, 마케팅 현황, 주주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항목도 있다. 사장관련 창에는 엊그제 쓴 접대비까지 나와 있다. 디지털 경제에는 모든 게 투명해야 한다는 전 사장의 철학이 담긴 사이버 노트다.

한컴을 정상화한 일등공신인 그는 얼마나 벌었을까. 현금이 없어 아내 카드로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12개월짜리 할부 태국 여행을 다녀와야 했던 그는 취임 당시 한컴 주식 10만주를 스톡옵션으로 3,600원에 받았다.

그 주식은 액면분할을 통해 10배 늘었고, 최근 주가로 따지면 300억원은 거뜬하다. ‘개인 사업을 할 때는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안달하다 보니 빚밖에 없었는데 한컴에 와 모든 걸 직원과 함께 나누니 오히려 큰 돈이 되더라’는게 그의 돈철학이다.


예카개념으로 사이버공동환경 구축

3년 임기의 그가 퇴임 전에 꼭 이룩하고 싶은 것은 ‘예카’로 알려진 인터넷 생태계 구축이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시장은 2,000만명이 끝이라고 확신한 전 사장은 인터넷의 각 분야가 서로 연계해 함께 살아가는 사이버 환경를 만들어야 2,000만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고 예카 개념을 확립했다.

예카란 한마디로 많은 기업이 함께 살아가는 사이버 공동체다. 네띠앙, 하늘사랑, 한소프트네트 등 한컴측이 확보하고 있는 600만 고객을 제휴한 117개 업체와 공동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한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다. 미국에서 열린 컴덱스에 첫 참가했던 1996년 11월, 호텔방 하나에 침대 5개를 놓고 생활하면서도 가슴뿌듯함을 느꼈던 흥분이 가져온 ‘대박’ 확신이다.

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몇차례나 “세계시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좁은 시장에서 티격태격 싸워봐야 상처밖에 더 남겠어요”라고 해외진출을 강조했다.

“세계화에는 철저한 현지화가 우선돼야 합니다. 소프트웨어를 하나 만들면 모든 설명서나 팜플렛을 영어로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한글입니다. 한글 팜플렛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어요.”그의 말은 여전히 확신에 차 있다. ‘한글에서 인터넷까지’에 담은 정신과 자신감이 오늘의 한컴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자산이다.

이진희·주간한국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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