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국내은행과 차별화

누가 뭐래도 2000년 현재 세계 경제의 기관차는 미국이다. 1991년 걸프전 이후 회복되기 시작한 미국 경제는 10년 가까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경제의 ‘10년 호황’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이론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실물경제, 그것도 증권시장에 정통한 인물이 고위 공직자로 대거 등용됐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1993년 집권한 클린턴 대통령은 로저 알트만, 로버트 루빈 등 월 스트리트의 금융인을 영입해 증권시장의 활성화에 주력했는데 특히 로버트 루빈(Robert Rubin)은 클린턴 인사의 백미였다.

골드만 삭스 공동회장이던 로버트 루빈은 국가경제위원회(NEC·National Economic Council) 위원장으로 클린턴 행정부에 참여했는데 1995년 재무장관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특히 아시아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제위기를 뛰어난 리더십으로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는데 지난해 7월 퇴임 당시에는 그린스펀 FRB의장으로부터 “미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재무장관”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세계 최대 은행 신용카드회사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퇴임 이후 루빈의 행보다. 루빈은 1999년 10월 현역 복귀를 선언했는데 그가 선택한 회사는 미국 최대 금융그룹인 씨티그룹. 씨티그룹은 1999년 10월26일 “샌포드 웨일, 존 리드 등과 함께 로버트 루빈 전장관이 씨티그룹의 3인 공동회장의 자리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흔히 ‘씨티은행’으로 더 알려진 씨티그룹은 어떤 회사길래 ‘미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재무장관’을 영입할 수 있었을까. 1812년 6월16일 200만달러 자본금의 ‘Citi Bank of New York’으로 시작된 씨티그룹의 성장사는 불과 200년만에 대영 제국의 변방 식민지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씨티그룹은 미국 경제의 해외진출 바람이 불던 1914년 미국계 은행으로서는 최초로 남미 아르헨티나에 지점을 개설했다.

또 1962년 ‘First National City Bank’로, 1976년 ‘Citibank’로 이름을 바꾸었고 미국에서 금융기관 합병바람이 불던 1999년에는 트래블러스 그룹과 전격적으로 합병해 세계 최대의 금융기관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현재 씨티그룹 내부에는 씨티은행(Citibank), 살로먼 스미스바니 증권, 트래블러스 연금(Travelers Life & Annuity) 등 7개의 사업부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씨티그룹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씨티뱅크는 전세계 100개 국가에 3,400개 이상의 지점 및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1998년말 현재 1억명의 고객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 6,5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은행 신용카드 회사이기도 하다.

이같은 규모 탓일까. 씨티그룹의 재무상태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지난해 말 현재 씨티그룹의 총 자산은 7,169억3,700만달러(약 788조6,300억원)이며 순이익 역시 98억6,700만달러(약 10조7,800억원)에 달한다.


외국은행 최초로 한국에 지점개설

그러면 씨티그룹, 보다 정확히 말해 씨티은행은 언제, 어떤 연유로 한국에 진출했을까. 또 그들은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실물분야에 비해 확실히 후진적인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씨티은행과 한국과의 인연은 1953년 씨티은행 고위 간부였던 레이몬드 케이시가 정부 초청으로 한국은행 국제금융부의 자문역으로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씨티은행은 이후 1967년 외국은행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에 지점을 개설한 뒤 1986년에는 소비자금융, 1988년에는 신용 카드사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힌 상태다. 요컨대 씨티은행은 초창기 한국 금융의 대외창구였던 셈이다.

실제로 씨티은행은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나선 이후 직면했던 수차례의 경제 위기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씨티은행 원효성 이사는 “씨티은행은 1973년과 1980년의 1,2차 오일쇼크 때 외국자본으로서는 유일하게 자본을 회수하지 않았으며 1998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외채협상에서는 윌리엄 로즈 부회장의 활약으로 한국 은행들이 217억5,000만달러의 외화대출금을 연장받도록 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원 이사는 또 “씨티은행은 현금자동 입출금기(1990년), VIP 뱅킹인 씨티골드(CitiGold·1991년), 폰뱅킹 서비스(CitiPhone·1993년), 리볼빙 카드(1999년) 등 선진적 금융수단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씨티은행은 이와 함께 경영측면에서도 국내 은행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씨티은행 서울지점은 자산 규모(1999년말 현재 8조1,485억원)가 국내 대형은행의 10~20% 수준에 불과하지만 당기순이익(1999년 1,308억원)은 국내 우량은행과 맞먹는다. 한마디로 국내 은행이 ‘고비용-저효율’구조라면 씨티은행은 ‘저비용-고효율’구조인 셈이다.

실제로 경영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인 총자산이익률(ROA·Return of Asset)의 경우 씨티은행(1.6%)은 한빛은행(-2.82%), 한미은행(0.24%) 등 국내 은행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이와 관련, 원효성 이사는“한국 기준으로 따질 경우 부실 여신이 전무할 정도로 대출심사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것이 높은 수익률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인사·노사 문제점 드러내

하지만 국내 은행의 10배에 가까운 경영 효율성을 자랑하는 씨티은행 서울지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먼저 최근 국내 은행이 잇따라 소매금융 분야를 강화하면서 입지가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씨티은행은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향후 2~3년간 국내 지점망을 대폭으로 늘려 소매금융 시장에 뛰어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현재까지 11개의 지점만을 갖춘 상태이다. 이와 관련,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최근 씨티은행의 동향을 보면 소매금융 진출전략을 포기한 것 같다”며 “소매금융에 진출하지 않은 상태라면 한국에서 씨티은행의 성장은 조만간 한계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씨티은행은 또 ‘인사-노사부문’에서도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 10월 안재원 명동지점장의 자살은 씨티은행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안 지점장 사건을 계기로 파견근로자 문제, 상대적으로 낮은 연봉 등 씨티은행에 잠재한 인사-노사문제를 집중 조명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노동조합과 경영진의 원만하지 않은 관계도 많은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 금융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