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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적진으로 날아간 승부사

1989년 4월 20일. 와이셔츠 차림으로 다녀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날, 저녁 8시 30분이었다. 선수 조훈현을 위시한 일행 12명은 결승 첫판이 벌어지는 중국 항주로 가기위해 경유지인 홍콩으로 날아간다. 수교가 되지 않은 국가이므로 항공로도 당연히 개설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3시간 걸려 도착한 홍콩에서 조훈현이 필승을 다짐하는 첫밤은 힘들었다. 후덥지근한 해양성 기후 탓인지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조훈현은 아내와 함께 노점의 비치파라솔로 향햇고 일행을 한둘씩 불러낸다. 알콜이라곤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조훈현이지만 그날은 캔맥주를 입 근처까지 가져가 보았다.

타고난 승부사지만 그에게도 건곤일척의 승부가 적당한 긴장감을 가져다 준 탓이었다. 그렇게 조훈현은 결승 시리즈의 첫밤을 보낸다.

이윽고 다음날 전장인 중국대륙으로 향한다.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곤 하지만 엄연히 아직 중국은 적성국가. 조훈현과 일행의 가슴은 이중으로 뛰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항주에 도착한다.

적지에 도착하고서도 긴장을 느낄 틈은 오히려 주어지지 않았다. 공항 관계자들로부터 밀려오는 사인요청 때문이었다. 조훈현은 이미 중국에서도 스타였다.

더욱이 며칠전부터 항주의 TV에서 네웨이평과의 대국예고를 예고해온 터라 조훈현의 얼굴이 항주사람에겐 꽤 익숙한 상태였다.

제1, 2국이 펼쳐질 샹그리라호텔로 향한다. 역사적인 매치가 벌어질 샹그리라호텔은 서호 주변에 위치해 있는데 주변 경치와 조화가 빼어난 일류대국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둘레가 18km가 되는 서호, 주변에 경관이 빼어난 명승지가 많아 중국인은 이를 합쳐 부르기를 '서호 10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평생 이곳은 한번 방문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여긴다. 중국인은 삼주(三州)를 가장 아낀다고 하는데 소주 항주 유주가 그것이다. 이 세고장은 모두 절강성에 있는데 소주에서 태어나 항주에서 살고 유주에서 임종을 맞는 것을 꿈으로 여긴다.

항주의 절경에 넋을 빼놓은 사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결전의 날이 밝는다. 샹그리라호텔은 아침 일찍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대국이 개시되기 전 취재진이 합세,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대국 개시 8분전 먼저 네웨이평이 호텔 별관에 마련된 대국실로 향했고 3분쯤뒤 조훈현이 수많은 인파 사이를 뚫고 플패시 세례를 뒤로 한채 입장한다. 그리고 남은 5분은 어색한 침묵으로 흘려보낸다.

조훈현은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우던 골초의 대명사였고 네웨이핑도 중국 최고의 애연가라 할 정도의 '굴뚝'. 어색한 5분의 기다림 동안 그들은 벌써 재떨이를 한번 비워야 했다. 담배가 그들에게 그렇게 애틋한 벗이 되어줄 줄은 정말 몰랐다. 5분은 긴 시간이었다.

일생일대의 큰 승부에 임하면서 적에게 안부를 묻는다든지, 어색한 미소로 거북함을 해소하려 한다든지, 불필요한 제스처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나는 몹시 떨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에 다름아니니까. 그래서 담배는 어색한 손과 눈과 표정을 감출수 있는 좋은 베일이 되었다.

당사자야 어찌되었건 TV 카메라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 뜨거운 조명이 뙤약볕을 만들었고 저마다 손에 든 카메라도 단 1초의 쉼도 없이 폭죽으로 터진다.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역사적인 한판이 지금 무르익고 있는 것이다.

네웨이핑이 백돌을 한움큼 쥐어 주먹을 쥔체로 바둑판 위로 올려놓는다. 조훈현은 장미를 여전히 입에 문 채 흑돌 하나를 올려 놓았고 네웨이핑은 자기가 쥔 돌을 둘씩 갈라놓으며 돌을 가린다. <계속>


[뉴스와 화제]

조훈현 패왕전 20년 우승

조훈현이 이성재의 도전을 2년 연속 물리치고 패왕전 20기 제패의 신기원을 열었다. 지난 1978년 패왕전에서 첫 우승한 이래 1993년까지 16연패를 기록했던 조훈현은 이후 1996년부터 다시 4연패에 성공해 단일기전 20년 제패라는 세계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한편 이성재는 작년 2승후 3연패로 준우승에 그쳤고 또다시 1스후 2연패를 당해 연속으로 준우승에 머무는 불운을 겪었다.


이세돌, 1·4분기 최우수 기사

이세돌이 1·4분기 최고의 기사에 올랐다. 다승 승률 연승 최다대국 등 4개 부문에서 모조리 1위를 달리고 있어 새천년 새강자로 확실히 자리매김 했다. 현재 이세돌은 18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데 다승 2위인 루이(13승 6패)와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최근 이세돌은 올해안으로 타이틀을 따내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는데 현재 7개 기전에서 본선에 진출, 활약중이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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