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수송동은 본디 조선조때는 수진방과 솔고개 였다. 그것을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수진방의 머리글자 '수'와 솔고개의 '송'을 떼어 만든 합성지명이 오늘날의 땅이름, 말하자면 일제가 청지갬여한 땅이름이다.

이 수동동 안에는 실제로 솔고개를 비롯해 박석고개, 괴정동, 중학다리, 사복동과 같은 풋풋한 땅이름이 있었지만 오늘날 이곳들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계사(수송동 44번지) 뒤쪽에서 솔고개(한국일보 자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깬돌을 깔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박석고개였다. 그 박석고개에서 한국일보사 쪽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고개마루에 사시사철 푸르디 푸른 송림이 울창하여 솔개라 했던가!

푸른 솔가지엔 솔바람 소리가 청아하고 조계사의 풍경소리와 독경소리 은은한 솔고개 자락엔 보성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봉성사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인쇄소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의 치하로 들어갈 무렵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를 설립하고 천도교 관련서적과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를 간행했다.

그해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의 경영권을 인수, 그 학교에 속해 있던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고 했던 것. 당시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인쇄계를 주도해나갔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 서적, 학교 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출판문화의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의 '인쇄'라고 하는 특수업종은 그 한계가 있었다.

결국 쌓이고 쌓인 적자로 인해 교회의 간부들은 손병희에게 "차라리 패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보성사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1919년의 3.1운동때 발표된 '기미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하여 보성사로 넘겨졌다. 같은 달 27일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 등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했다. 총2만1,000매의 '기미 독립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 이를 이종일의 집으로 운반한 뒤에 18일 나라 안의 각 지역에 몰래 배포함으로서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일제히 거행할 수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중 인쇄소의 기계소리를 듣고 온, 당시 악명높기로 이름난 친일 고등계 형사 신승희에게 현장이 발각됐다.

이에 이종일이 신승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나온 뒤에 손병희로부터 건네받은 5,000원을 그에게 주며 눈감아주기를 애원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인쇄가 끝난 독립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이종일의 집으로 가던 중 종로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관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례읠 짐은 족보"라고 속여 무사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머리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그 뒤에도 이 보성사에서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계속 발행했다.

결국 일제는 보성사를 패쇄, 1919년 6월 28일 불태워버렸다. 빌딩 숲에 가려진 보성사터는 지금 소공원으로 단장돼있다, 솔고개 자락 솔숲에서 청솔같은 기개를 폈던 선조들의 푸른 넋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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