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협상, 인내가 필요합니다"

강영훈 전 총리(78·세종재단이사장)는 지난 4월10일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10년전 일이 생각났다.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후 남북교류를 강력히 추진한 강 전총리는 분단이후 최고위 인사로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건의했다.

강 전총리는 또 세차례 남북 총리급 회담을 갖고 1992년 후임인 정원식 총리와 연형묵 북한총리사이에 남북기본합의서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하고 있는 강 전총리를 만나 10년전 직접 경험했던 남북 총리급 회담의 뒷이야기와 남북 정상회담의 과제와 전망 등을 들어보았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북관계 개선에 일대 계기가 될 겁니다. 역대 정권, 특히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가 그렇게 절실히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고 김영삼 정부는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는 등 운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북의 사정이 맞아 떨어져 급진전된 것같습니다.”


-남북의 사정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북한은 현재 경제난이 아니라 경제파탄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부지원이 필요한데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을 통해 사회간접자본 지원 제의를 하니까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거죠. 우리로서는 북한과 관계를 평화공존쪽으로 분위기를 이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북한을 개방시키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필수적이지요.”


-북한이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이상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 회담분위기를 망치지는 않겠지요.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1990년에 세차례 북한측과 협상한 경험을 비춰보면 북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원조는 되도록 많이 받되 자기 체제에는 전혀 영향이 없도록 하는 대신 우리의 체제는 가능한 분열시킨다는 겁니다. 회담을 통해 상호이익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흐트려뜨리자는 거죠. 제가 1990년 10월 평양에 가기전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건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김 주석은 ‘총리들이 만나서 다 합의하면 정상들이야 차나 한잔 마시고 사진이나 찍으면 되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있나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총리급이 합의하면 지키겠다는 뜻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여곡절끝에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가 체결됐는데 북한은 ‘이를 실천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조건을 달았습니다.

아무 조건없이 이산가족문제는 남북적십자사를 통해 논의한다고 합의해놓고도 전제조건을 달았지요. 물론 이번에는 북한이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이상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은 되지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제가 평양을 갔을 때는 김일성 주석이 있었으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요. 만난 적은 없습니다.”


-우리측 회담 관계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북한과 많이 접촉해왔기 때문에 북한의 생리에 대해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북한은 50년이 넘도록 대남업무만 해온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무엇보다 북한과 회담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1988년 말 제가 총리에 취임한 뒤 알아보니까 북한이 부총리급 회담을 제의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각에 총리급 회담으로 승격해 다시 북한에 제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북한측은 3주만에 이를 수락했는데 정작 회담이 이뤄지기까지 실무회담으로 1년7개월을 보냈습니다. 북한과 협상은 절대로 조급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똑같은 말이라도 북한은 우리와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게 이번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도 나와있지만 7·4 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북한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냐 하면 자기네는 ‘자주’인데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다, 북한은 평화를 지지하지만 남한은 미군과 훈련하면서 북한을 무력침공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같은 북한의 전략을 잘 알지만 국민은 혼돈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문제나 통일에 관한 한 우리 내부의 단합노력이 중요합니다. 여야가 따로 없습니다.”


-북한도 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요. 북한의 경제는 점점 파탄이 나고 있습니다. 제가 1990년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할 때도 이미 북한은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연 총리한테 ‘우리는 쌀이 남아돌고 있어 북한에 넘겨줄 용의가 있다. 그냥 주면 자존심이 상할테니 북한의 석탄이나 지하자원과 교환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연 총리는 ‘식량걱정 같은 건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하더니 그 이후 태국인가 어디에서 외상으로 쌀을 수입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만 북한이 그때부터 식량이 부족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수령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북한체제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북한을 개방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남다른 지혜가 필요합니다.”


-정상회담에서 가장 먼저 다뤄야할 의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선언한 네가지 내용이 주의제가 되겠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 조성입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말살하려는 것은 민족에게 또다른 죄를 짓는 겁니다.

정상회담에서 이런 일은 없도록 서로 다짐해야 할 겁니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한편에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햇볕정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번째로 남북정상이 시급히 다뤄야 할 문제는 이산가족입니다. 1,000만 이산가족의 상봉문제를 더이상 늦춰서는 안됩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4/20 22:36


송용회 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