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총선후 정국주도-북, 생존 최후카드

남북통일이 당파적 정략을 떠나 추구해야할 과제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실제 추진 과정에서는 정략적 계산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현실론 역시 일축하기 어렵다. 목적과 수단, 또는 이념과 과정간의 모순은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진흙탕(정략) 위에서 연꽃(통일)이 핀다’는 논리로 정략적 목적이 개입된 통일 추진을 정당화하거나 불가피하게 여기는 한 극단이 엄연히 존재한다. 또 한 극단에서는 4·13 총선을 사흘 앞두고 빅카드를 꺼낸 의도를 의심한다. 이같은 논란은 북한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합의 속사정에 관심 집중

남북한, 보다 정확하게는 DJ 정권과 김정일 정권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4월10일 오전 10시 동시에 발표한 저의는 무엇일까. 외국 언론들도 국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정상회담 합의 자체는 환영하되 쌍방의 ‘내부 정치’에 대한 분석을 빼놓지 않았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11일 ‘한국의 정상회담은 총선전략으로 보인다’(Korean Summit Seen as Election Ploy)란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 “미 공화당과 한국 야당 지도자들은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북한을 끌어들여 한국의 총선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는 서울과 워싱턴을 경쟁시켜 더많은 원조를 얻어내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신문은 4년전 한국 총선 직전의 ‘북풍’(北風)을 예로 들며 “이번에는 북한이 김대중 대통령을 지원하려는 것으로 믿는 관측자들이 많다”고 썼다. 나아가 “한국 여당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주요한 업적으로 선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같은 날 LA타임스는 북한의 속사정에도 주목했다. “김정일은 극도로 궁핍한 나라를 통치하고 있으며 국민은 굶주리고 경제는 계속 수축되고 있다. 김정일은 더이상 대안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외부로 나오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도 “이번 합의는 과거 오랫동안 남한과 접촉을 피해왔던 북한의 정책에 중요한 전환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발표시점이 시점이었던 만큼 당연히 야권은 정략적 측면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며 청와대와 여당을 공격하고 있다. 야권의 주장은 이번 합의가 ‘총선용 정략’의 소산이며 조기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북한과 이면합의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면합의란 북한에 뭔가 구미가 당길만한 대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다.

청와대측이 당초 ‘총선후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갑자기 총선전에 발표한 것도 야권의 의심을 키웠다. 야권은 정상회담 합의 발표가 ‘베를린 선언’, ‘북한특수 발언’으로 점차 수위를 높여온 총선 바람몰이 시나리오의 결정판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민족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략적 공세”라며 맞받아치고 있다. ‘통일대업을 수행하는데 시기를 따질 이유가 없다’는 태도다.


명분·실리 챙길‘양날의 칼’

그러면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추진한 뜻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객관적인 사실에서 출발해보자. 김 대통령은 국가수반과 민주당 총재라는 위치를 동시에 갖고 있다. 국가 최고위자로서 통일을 추진할 책무와 정당의 수장으로서 정파이익을 지켜야 하는 자리를 함께 점하고 있다.

두 개의 위치는 ‘윈-윈’관계에 있을 수도 있고 모순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 정치적 저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결국 민주당 총재로서의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뭔가를 얻어내려 했다고 봐야 한다.

민주당 총재로서의 김 대통령과 직접 연결되는 명제는 총선이다. 총선에서 민주당이 제1당이 되느냐의 여부는 집권 후반기 정국 운영의 키가 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남북 정상회담을 ‘총선용 신북풍’으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야권의 막판 세몰이 기세를 꺾어 수도권 박빙지역에서 민주당이 우세를 점하자는 계산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다.

정상회담의 약발은 총선전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총선후 용도가 더 클 공산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명분을 이용해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켜 야권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4·13 총선이후 김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에 예상되었던 수순중 하나는 사정(司正)정국.

여권의 일부를 읍참마속하면서 야권의 비리를 캐내 정국 주도권을 유지할 수 밖에 없으리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은 피차 피를 흘려야 하는 사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과적인 정국운영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남북 정상회담은 이런 점에서 김 대통령에게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가져다 주는 ‘양날의 칼’이다.

재채기가 감기의 표시라면 남북 정상회담 합의는 장막에 가린 북한에도 뭔가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의미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서 김 대통령과 대좌한다는 사실은 김정일의 ‘홀로서기’가 공고화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김일성 사후의 샤머니즘적 ‘유훈통치’에서 벗어나 더이상 아버지의 음덕에 기대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를 굳혔다는 이야기다.


김정일 홀로서기 정지작업

노동신문은 11일 김정일이 35년전 해외를 방문했던 사실을 뒤늦게 ‘획기적 사변’이라고 찬양했다. 김정일은 1965년 4월 김일성을 수행해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반둥회의에 참가한 바 있다.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당시 회의에서 비동맹 운동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35년전 반둥회의 참가와 6월 남북 정상회담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국제적 초점이 된 정상회담에 김정일을 자연스럽게 데뷔시키기 위한 정지작업이란데 별 이견이 없다.

유훈통치 탈피와 경제난 탈피는 표리관계에 있다. 항일투쟁과 북한 정권수립 과정에서 막대한 카리스마를 갖게 된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의 홀로서기에는 ‘실적’이 필수적이다. 김정일이 경제적 실적을 올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남한의 도움이다.

북한은 1993년 이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과 미사일 시험발사 등의 수단을 통해 남한을 따돌린 채 미국과 직접 협상(통미봉남·通美封南)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남한의 적극적 지원이 없는 대미협상은 어려웠다. 대일 수교협상도 지지부진하긴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지난달 열린 북·미회담에서 남한의 대북한 전력공급을 미국이 주선해주도록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한의 경제적 가치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제스처다. 대북 경수로 지원을 위한 한반도에너지기구(KEDO)에서도 결국 돈이 나오는 곳은 남한의 호주머니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결국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의 실리주의와 DJ의 정국운용 포석이 맞아 떨어져 비로소 가능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정략과 계산이 어느 정도 개입됐는지 여부는 총선후 정상회담 합의를 이행해가는 양측의 태도에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정략이 개입됐다고 합의 자체를 매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이성(理性)의 간지(奸智)’란 용어를 사용했다. ‘역사는 역사적 행위자들의 당초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4/20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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