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일본에서는 한동안 잠잠했던 ‘다나카의 저주’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다나카는 물론 1993년 타계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총리를 얘기하는 것이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총리의 뒤를 이은 자민당 최대 파벌의 영수로 1972~1974년 자민당 총재 겸 총리로서 일본을 주물렀던 인물이다. ‘일본열도 개조론’에 바탕한 대대적인 국토개발 사업으로 사회간접자본을 완벽하게 정비, 비약적 성장의 토대를 닦았으며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등의 공적을 남겼다.

일본 국민은 무엇보다 ‘서민 총리’로서의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초등학교 졸업후 바로 공사판에 뛰어들어야 했을 만큼 가난했던 그가 맨손으로 몸을 일으켜 총리가 된 것은 ‘현대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자 ‘재팬 드림’의 표본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금권정치의 실상이 폭로되면서 내각 총사퇴를 해야 했으며 1975년에 터진 ‘록히드 사건’과 관련, 1976년 수뢰혐의로 구속됐다. 전직 총리가 총리 시절의 범죄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었다. 1983년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의 판결을 받고 항소했으나 기각됐고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인 1993년 타계, 형이 확정됐다.

구속과 함께 여론의 비난이 빗발친 데다 미키 다케오(三木武夫)·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총리 등 정적이 정권을 주도하는 바람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쇠퇴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힘을 회복, 이어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스즈키 젠코(鈴木善幸)·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정권을 뒤에서 조종했다. 모두가 자민당 최대 파벌의 영수라는 지위에서 나온 힘이었다.

재판이 불리하게 기울어가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영향력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당시 간사장을 파벌 영수로 삼으려는 내부 반란으로 급전직하했다. 설득에 골몰하던 그는 1985년 2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죽는 날까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니 다케시타파에 대한 그의 배신감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나카의 저주’는 1996년 3월 가네마루 신(金丸信) 자민당 전부총재가 뇌경색으로 죽을 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다케시타파의 후견인으로 다나카 이후 일본 정계의 대부로 군림했던 그는 거액의 정치헌금 스캔들과 관련,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재판으로 마음을 졸이다 쓰러졌다.

이어 지난해 4월 허리 통증을 이유로 입원한 다케시타 전총리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입원해 있다. 주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암 등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꼭 1년만에 그의 정치적 양자인 오부치 전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다나카의 저주’는 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기지만 현실의 사건을 저주·원한이라는 초현실적 잣대로 재려는 일본인의 잠재의식을 드러내는 예다. 일본인의 종교의식의 바탕에는 지금도 ‘온넨’(怨念·원한)을 품고 죽은 ‘온료’(怨靈·원혼)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온료’가 현실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인 ‘다타리’(崇り·해·탈)를 해소하려는 각종 제의가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런 믿음은 나라(奈良)시대(710~784년) 말기부터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년) 초기에 ‘고료’(御靈·영혼의 높임말)신앙으로 나타났다. 정변에 휘말려 비명에 숨져간 황족·호족 의 ‘온료’가 당시의 천재지변과 전염병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이를 풀어 해를 피하고 죽어서도 보통의 영혼보다 지위가 높은 ‘슈퍼 영혼’의 특별한 힘에 의지하려는 제의인 ‘고료에’(御靈會)가 퍼져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슈퍼 영혼’이 아닌 평범한 영혼도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됐다. 일본의 소설이나 영화가 ‘온료’에 집착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일본은 귀신이 우글거리는 나라이기도 하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4/20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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