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뉴욕에 있는 한국 사찰을 방문했다. 미 동부에서는 유일한 한국식 대가람이라고 해 ‘과연 한국 불교가 미국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워싱턴 DC에서 6시간 가량 운전하여 북쪽으로 올라갔다. 아주 화창한 봄날이었으며 워싱턴 사람들은 모두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봄날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둘러보니 과연 한국의 깊은 산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대가람의 건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람드리 기둥에 대들보를 세우고 서까래를 얹은 대웅전은 바로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뿌리내린 한국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 놓여있는 두 개의 석등과 계곡으로 돌아흐르는 시냇물은 한국의 명산 대찰에 들어선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월도 이제 중순에 접어들어 노랗게 피었던 개나리는 이미 한풀 꺾이고 철쭉과 벚꽃이 한창 물오르는 것을 워싱턴에서 보고 올라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것도 그저 잔설을 흩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있자니 과연 어디를 가리켜 미국이라고 할 것인가 난감해진다. 눈보라치는 뉴욕인가, 아니면 포토맥 강변에서 반팔 티셔츠를 입고 벚꽃 구경을 하는 워싱턴이 미국인가. 아니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 작렬하는 태양 아래 스노클링을 즐기는 플로리다인가.

동양 사상을 찾아보겠다고 눈보라치는 뉴욕 산중의 한국 사찰이나 티벳 사찰을 찾는 벽안의 남녀들이 미국인인가, 아니면 지하철 역 앞에 앉아 잡화를 팔다가 시간이 되면 길바닥에 담요를 깔고 성지를 향해 절을 하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아랍계 할아버지가 미국인인가.

워싱턴에서 뉴욕을 가다보면 몇 개 주를 거쳐야 한다. 각 주의 경계가 바뀌는 것은 ‘OO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팻말 이외에도 여러 군데서 느낄 수 있다. 먼저 주유소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유소에 가면 운전자가 직접 펌프에서 호스를 뽑아 차에 기름을 넣는다. 이에 비해 차를 주유대에 갖다대면 주유원이 나와서 기름을 넣어주고 유리창을 닦아주거나 엔진 오일을 검사해 주기도 하는데 이를 ‘풀 서비스’(full service)라고 하며 자기가 직접 기름을 넣는 ‘셀프 서비스’(self service)에 비해 기름 값이 비싸다.

그런데 뉴저지주의 주유소는 전부 풀 서비스 밖에 없다. 옛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의 본부가 있었던 곳이어서 그렇다. 한편 델라웨어주에서는 sales tax를 매기지 않는다. 그래서 알뜰 살림꾼들은 TV 냉장고 등 고가의 가전제품을 살 때는 델라웨어까지의 행군도 불사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펜실베니아주와 뉴저지주에서는 옷을 사면 sales tax를 안내도 된다.

과거 섬유 산업이 발달했었을 때 업체의 강력한 로비로 인해 옷에 대한 sales tax를 면제했던 것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애연가들은 버지니아주에 사는 것이 좋다. 강 하나를 경계로 두고 있는 매릴랜드주에 비하여 담배 값이 거의 절반 수준이다.

담배 농사가 식민지 시대부터의 전통산업인 버지니아주에서는 다른 주처럼 담배 소비 억제를 위한 특별세를 부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 뉴욕에 가는 길목에 통과하는 주만 살펴보아도 이러한 차이가 있다. 미국은 50개 주와 연방 정부가 있는 워싱턴 DC 및 그 밖의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워싱턴에서 살다보니 서울의 친구에게서 가끔 이런 부탁을 받는다.

한국에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겼는데 미국의 제도는 어떤가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것이다. 난감한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의 제도가 하도 다양하여 원하는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지형과 기후, 인종적 문화적 배경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단일 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 지내온 우리로써는 이해못할 정도로 수많은 제도와 관행을 낳았다.

다만 이 다양한 구성원 및 문화의 충돌을 조정하는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법의 지배’(rule of law)다. 따라서 ‘미국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법의 지배’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입력시간 2000/04/2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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