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었던 계곡이 옷을 입는다. 노란색을 머금은 초록빛. 나무와 물과 여행자의 마음이 모두 한 빛이다. 신록의 계곡은 색깔만큼 다정하다. 너럭바위에 앉아 따스한 봄볕을 맞으며 계곡물에 발을 담가보는 것은 어떨까.

충북 괴산군의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에 연초록의 변주가 시작됐다. 같은 물줄기면서도 약 10리의 거리를 두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흐르는 두 계곡은 신록을 완상하기에 그만이다. 여름이면 사람의 행렬에 모든 것이 묻힌다. 한가로운 여행을 원한다면 4월말부터 5월 중순이 적기다.

화양계곡은 가슴이 따스한 남정네같다. 넓은 계곡과 우람한 바위는 자질구레한 화장을 하지 않았다. 계곡물은 완만하게 흐르고 나무들은 굵다. 모두 아홉 곳의 명소가 있어 화양구곡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이 아홉 명소의 이름을 지었다.

그중 으뜸은 암서재(岩棲齋). 송시열은 가장 풍광이 좋은 곳을 골라 공붓방을 짓고 말년에 그곳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물가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를 주춧돌 삼아 방 한칸짜리 집을 올렸다. 원목의 색깔을 그대로 살린 옛 건물은 깊은 자연 속에서도 전혀 튀지 않는다.

자연에 녹아든 인공. 선인의 심미안에 감탄할 뿐이다. 암서재의 바로 앞은 금사담(金砂潭)이다. 금모래는 거의 없고 물에 잘 닦여진 금빛 너럭바위가 있다. 사람들이 올라앉았다. 모두 편안한 표정이다. 담의 파란 물빛이 너무 강렬하다. 얼굴을 씻고 싶은 충동이 인다.

화양계곡의 상류인 선유동계곡은 여성스럽다. 아기자기하면서 화려하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광에 취해 오래 머물렀다. 이황은 아홉 곳의 절경에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선유동구곡이라고도 한다.

계곡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곳은 와룡폭포. 비스듬히 누운 바위를 타고 계곡물이 흐른다. 주변 바위가 사람이 올라가기에 적당하게 배열돼 있어 폭포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

와룡폭포의 상류로는 기암의 연속이다. 계속 돌을 타고 물을 따라가면 바위 계곡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물에 잠긴 바위에 이끼가 껴 기름칠한 것보다 미끄럽다. 무게 중심을 물 속 바위에 두면 넘어지거나 미끄러져지기 십상이다. 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면 반드시 모래바닥을 골라야 한다.

충북의 자랑거리인 두 계곡은 관리가 ‘지나치게’ 잘돼 있다. 계곡 끝까지 올라도 신발에 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길이 포장돼 있고 가로등까지 설치해 놓았다. 흠이 있다면 그게 흠이다.

중부고속도로 증평IC에서 빠져 좌회전, 증평(510번 지방도로)→청안→부흥→금평(이상 592번 지방도로)을 거치면 화양계곡 입구가 나온다.

서울서 약 3시간 소요. 청주에서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의 중간지점인 송면리행 직행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괴산은 인삼과 고추의 고장. 도로변에 비닐을 씌운 고추밭과 검은 지붕을 드리운 인삼밭이 함께 펼쳐지는데 색의 대비가 볼만하다.

화양계곡(화양계곡 관리사무소 0445-832-4347) 입구에 대규모 민박단지가 있고 계곡 군데군데 자리잡은 식당에서 민박도 겸한다. 선유동계곡은 주차장 앞 선유의 집(0445-833-8056)에서 민박을 친다. 2만~3만원선. 좋은 시설을 원하면 보은(속리산관광호텔 0433-542-5281)이나 증평(증평파크관광호텔 0445-836-9889)을 찾아야 한다.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0/04/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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