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가리니 흑돌 한 개를 올려놓은 조훈현의 ‘홀짝’이 맞아서 돌의 선택권을 조훈현이 갖게 되었다. 우리 식이라면 홀짝을 맞춘 사람이 흑을 들게 되어있지만 잉창치식에서는 홀짝을 맞추면 돌의 선택권을 가져간다.

“조선생,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백”

조훈현은 1초도 기다림 없이 단호하게 백을 택한다. 당연하다. 덤이 7집반이면 당연히 백을 들지 않겠는가. 짧은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중국인은 당연히 네웨이핑을 응원할 것이고 흑을 든 네웨이핑이 일단 불리할 것이란 짐작은 누구든 가능할 것이니. 반면 한국측에서는 기분좋은 징후지만 드러내놓고 기뻐하진 못한다. 적지이므로.

운명의 제1국은 이렇게 개시된다. 세계 제1인자를 가리는 시리즈의 첫 판. 흑을 든 ‘반달곰’ 네웨이핑은 예상대로 속도를 낸다. 평소같으면 ‘만만디’ 네위이핑이 느긋하게 국면을 이끌어야 어울릴텐데, 그가 먼저 재빨리 걸치는 등 덤을 의식한 속도전을 전개한다. 거북이처럼 더딘 사람이 뭔가에 쫓기는 듯 재빨리 움직이는 건 어색했다.

하기야 조훈현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전류처럼 빠른 조훈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황소걸음을 해댄다. 기보만 갖고 주인공을 찾으라면 느릿느릿한 흑은 조훈현이요, 스피드광이 된 백은 네웨이핑이었다.

역시 덤은 큰 문제였다. 프로들은 한집 두집의 차이로 결국은 만방에 이르곤 한다. 미세하지만 뒤진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무리를 해야하고 그 무리는 역전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거꾸로 대패(大敗)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반집을 지나 만방으로 지나 똑같고,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 똑같다. 따라서 덤이 7집반이라는 건 이미 2집을 지고 들어가는 것이나 똑같으니 누구라도 흑을 들면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조훈현은 지금의 이창호를 보는 것처럼 견실무비했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게 운신했다. 어색한 변신이지만 승부를 위해선 최선의 방책이다. 상대의 서두름이 극에 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네웨이핑이 먼저 경직된다. 40만 달러의 체감은 한국인에게도 엄청난 거액이거니와 환율이 1백배에 달하는 중국인에게는 가공할 숫자. 네웨이핑의 흥분은 극에 달해 내려올 줄 몰랐다.

“아냐, 이건 아냐. 조선생이 받아주지 않아. 네선생이 굳어있어.”

고작 30수를 두었을 때다.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우칭위엔 선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웨이핑에게서 좋지않은 수가 나온 것이다. 원정길에 나선 우리 선수단은 내놓고 만세를 부를 수 없어서 그렇지 우칭위엔의 감상 한마디는 낭보에 다름 아니었다.

네웨이핑은 제4선을 쭉 뻗으면서 백 석점을 달라고 했다. 물론 안줄 것이고 그래도 선수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조훈현은 손을 돌려 선공을 펼치는게 아닌가. 하변에 위치한 흑말이 공중에 떠버렸다. 애당초 백 석점을 잡자고 덤벼들었건만 오히려 자신의 대마가 몰리다 보니 문제의 백 석점은 잡아먹지도 못하고 입맛만 다시게 된다. 공중에 대마가 떠 있다는 건 조훈현에겐 승리의 애드벌룬이나 매한가지.

“흑33이 패착이다. 이 수로는 좌하귀로 향해야했다….” 이튿날 중국의 인민일보는 우칭위엔의 말을 인용해 그 초반의 문제수를 패착이라고 지목했다. 패착이라…. 그럼 제1국을 조훈현이 이겼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 운명의 제1국을 조훈현은 보기 좋게 낚아챈다. 5번기에서 제1국의 소중함이야 이루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결과론을 먼저 들먹여서 그렇지, 현장에서 한판을 이겨가는 과정은 실로 처절무쌍했다고 전해진다. <계속>


<뉴스와 화제>

· 후지쓰배 8강 한국 3명 올라-이창호는 탈락

한국 3명, 중국 3명, 일본 2명. 제13회 후지쓰배 8강이 확정되었다.

한국은 2년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유창혁을 필두로 ‘대표기사’ 조훈현, ‘괴동’ 목진석 등 3명이 각각 위빈, 조치훈, 조선진을 이기고 8강에 올랐다. 한편 중국은 창하오 류샤오광 저우허양 등 3명, 일본은 고바야시 사토루, 장휘 등 2명이다.

이로써 후지쓰배에서 두번을 우승한 유창혁은 대회 세번째 우승을 바라보게 되었고 목진석은 세계대회 출전사상 처음으로 8강까지 올랐다. 반면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최강 이창호와 중국의 일인자 마샤오춘이 빠진 것이 특기사항인데 이창호는 중국 ‘6소룡’의 일원인 저우허양에게 패했고 마샤오춘은 대만 출신의 신예 장휘에게 패해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편 8강전은 6월중 한국에서 열리며 대진은 다음과 같다. 유창혁-창하오, 조훈현-저우허양, 목진석-장쉬, 고바야시 사토루-류샤오광.

· '무패소년' 이세돌 23연승 중

‘비금도 소년’ 이세돌의 연승기록이 하염없이 이어지고 있다. 올 들어 전승을 기록중인 이세돌은 지난주에도 3승을 추가해 연초부터 23연승을 기록중이다. 한편 한국기록은 이창호가 세운 41연승.

입력시간 2000/04/24 19:3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