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인간, 뱀파이어, 노스페라투 등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을 유혹하고 파멸로 이끄는가 하면 자기 복제를 하고 또한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품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내로라 하는 영화 감독들이 이 불가사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안소니 윌러가 <파리의 늑대 인간>을, 닐 조단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웨스 크레이븐은 <뱀파이어 인 프룩클린>을, 프란시스 코플라가 <브람 스토커의 뱀파이어>를, 케네스 브래너가 <앤 라이스의 프랑켄슈타인>을, 아벨 페라라기 <어딕션>을, 로베르토 로드리게즈가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기예르모 델 토로가 <크로노스>로 최근의 재생산 목록을 채웠다

흡혈귀 처형을 그린 <슬라이어>와 총과 칼이 난무하는 미래 배경의 <블레이드>가 추가됨으로써 흡혈귀에게 매달려 처단과 복수와 영생을 노래하며 피를 흘리는 감독은 신인에서 노장까지 연령을 초월하고 있다.

여기 21세기형이라고 자부하는 뇌쇄적인 뱀파이어가 등장했다. 1972년생인 제이크 웨스트가 1998년에 발표한 <뱀파이어의 분노:Razor Blade Smile>(18세 가, 스타맥스).

영화 신동답게 웨스트는 제작, 연출, 각본, 편집을 도맡아 1998년 밴쿠버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뱀파이어의 분노>가 이제까지의 흡혈귀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단연 스타일이다. 우선 영상미가 빼어나다. 수백 개의 면도날이 도열했다가 칼바람에 휘날리듯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도입부의 처리는 원제목과 맞아 떨어지는 놀라운 컴퓨터 효과를 보여준다.

고성을 배경으로 하여 망토를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는 19세기로부터 노트북을 펼쳐 정보를 주고받는 21세기로 넘나드는 흑백 영상에다 피만 붉게 처리하여 인상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현재 속으로 끼어드는 과거 영상의 플래쉬 백으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흡혈귀의 여행.

피를 빨고 나서는 술이나 마약 복용 여부 등에 따라 피의 등급을 매기는 것도 꽤 신랄해 보이고 “뱀파이어가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거울 앞에서 야하게 화장을 한다든가, 선글라스만 끼면 햇빛 아래서도 활보할 수 있다는 점은 흡혈귀의 영역 확대라 할 수 있고, 핸드폰을 일상용품으로 챙기면서 십자가 따위로는 물리칠 수 없음을 공언하는 반종교성도 내보인다.

흡혈귀로서의 자아 성찰도 빠질 수 없다. “뱀파이어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완벽한 인격을 갖춘 뱀파이어야말로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실제적이면서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뱀파이어가 될 수 없다”는 자문자답이 그것이다.

19세기. 사랑하는 연인의 결투를 말리다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던 릴리스 실버(아일린 델리)는 연인의 적수였던 블레이크경(크리스토퍼 아담스)에 의해 뱀파이어로 탄생한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나를 통해 영원한 세계로 가라”는 영상에 시달리며 릴리스는 청부살인을 통해 피를 공급받는다. 길고 긴 살인의 여정 끝에 자신을 청부살인자로 몰았던 존재가 곧 19세기에 만났던 블레이크경임을 알게 된다.

“연인과의 길고도 위험한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게 뱀파이어의 장점이지. 인간은 결코 악을 해결하지 못해”라는 냉소적인 결론에 이르며 행복에 겨워하는 현대의 릴리스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0/04/2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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