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 세사을 담는 '역사 기록자'

10년전 이맘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더 정확히 1990년 4월26일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5분안에 이 사람만큼만 대답할 수 있다면 다음 주엔 당장 당신도 ‘인간탐구’의 대상이다.

“그날은 목요일이네. 날씨는 맑았구. 그날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 사초를 모두 끝냈어요. 아는 석재사 사장님이 실비로 해줘서 동생이랑 비용을 반반씩 부담했어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20년전 4월26일도 얘기할까요?

그날은 토요일인데, 그 얼마전에도 보약을 스무첩이나 지어다 먹은 친척중 한 분이 또 약값을 모른 척 하기만 해서 ‘이건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닌가’ 좀 언짢았던 날이예요. 10년동안 한 동네에 살았으면서도 곧 광주로 이사나간다는 제 얘기에 고작 한다는 인사가 ‘잘 가게’ 한마디 뿐이더라니까요. 1970년 같은 날짜엔 그해 들어 나들이 인파가 가장 많았대요.

창경원에 21만5,000명, 구례 화엄사만 해도 하룻동안 2만여명이 몰렸답니다. 그 북새통에 어린이 하나가 인파에 깔려 죽고, 92명이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렇게 난장판이 될 만큼 다들 봄나들이가 한창인데 왜 나는 마음의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번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사는 걸까, 기분이 우울했지요. 40년전 것도 말해드려요?”


47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일기쓰기

이 사람은 광주 신안동에서 감초당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박내욱(62)씨다. 이실직고하자면 이 기억은 물론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직접 쓴 일기장을 찾아 되건져온 것들이다. 10년전, 20년전, 또는 그 어느 빛바랜 날짜든 그에겐 사진처럼 생생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당시의 기록이니 한마디 ‘창작’도 없을 뿐더러 시종 솔직하다.

박씨는 기네스북에도 이름이 오른 국내의 일기 최장기록 보유자다. 그가 건네주는 명함 한면에도 일기장 사진을 실은 것은 물론, 생업인 한약방 이름보다도 기네스 타이틀을 앞에 쓸만큼 스스로도 큰 자랑거리다.

47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적은 일기가 200쪽짜리 노트 84권의 분량, 1만7,000여쪽에 이른다. 그외에도 금전출납부와 처방전 기록까지 각각 40년, 30년째를 맞는다. 한번 시작했다 하면 뭐든 오래 쉽게 버리지않는 성미는 운동도 마찬가지. 15년째 계속해오던 테니스도 얼마전 관절의 무리를 겪고서야 겨우 놓았다. “잘 하덜은 못해도 뭐든 끈질기게 하는건 있죠, 제가.”

그의 일기는 한마디로 보통사람의 눈으로 기록한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이야기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때인 1953년부터. 전쟁고아로 자란 그의 험난한 인생역정은 물론, 갖은 파란과 격변의 물살을 건너온 한국사의 흔적이 낱낱이 씌여있다.

문구조차 조악하던 초창기엔 붉은 빛이 감도는 저급 종이 위에 가루잉크를 물에 풀어가며 그것을 일일이 펜으로 찍어 적던 시절도 있었다. 생활은 고단해도 일기안에서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쓰고 말할 수 있었다. 사안에 따라선 마치 사회부 기자처럼 긴박한 어조로 그때그때의 사회, 정치상황을 적기도 하고, 때로는 논설위원도 됐다가, 예언자도 됐다가, 문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일기 안에는 그 모든 시점이 다양하게 섞여있다. 현재도 ‘역사기록자’의 한 사람이라는, 스스로 짊어진 사명감으로 신문 한 장 건성으로 읽는 법이 없다. 특기할만한 사항이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의 일기장엔 깨끗하게 오려붙인 기사스크랩이 붙고 그의 촌평까지 더해진다. 이를테면 손바닥만한 16절지 크기 일기장 안에 그는 자신의 세상을 편집하고 있는 셈이다.


일기장은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1950년 10월23일 월요일 날씨 구름, 비. (누군가) 새벽에 한 방에서 잠자던 어머님을 불러냈다. 나는 동생을 방구석에 밀어넣고 부엌문으로 빠져 달아났다. 끌려간 어머니가 영영 소식이 없는 마지막의 저승길인지도 모르고…, 날이 밝은 뒤 나는 동생을 들쳐업었다. 마을로 나왔지만 누구 한 사람 어머니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없었다.>

경찰공무원인 아버지와 글, 수예에 능한 자애로운 어머니 아래 누리던 박씨의 평화는 6·25로 인해 일시에 무너졌다.

그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전쟁이 터지자마자 아버지를 잃었다. 공산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아버지와 함께 가 수습하던 아버지의 처참한 시신은 아직도 끔찍하고 고통스런 기억이다. 얼마 뒤 어머니마저 한밤중에 자다말고 끌려간 뒤 목숨을 잃었고, 박씨는 두 번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위의 내용은 그 현장에서 적은 일기의 일부.

“부모님을 모두 잃었을 때 제 동생은 겨우 두 살이었어요. 그애를 업고 다니며 젖도 얻어먹이고, 고생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동생은 부모님 얼굴을 몰라요. 그렇게 살면서 맺힌 한과 눈물 때문에 더 열심히 일기를 적었습니다. 그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부모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나중에 꼭 동생에게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쟁고아가 된 그가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건 보훈가족이라는 이름 덕분. 중학생이 된 뒤엔 큰 집에 얹혀살며 동생을 할머니품에 맡기고 학교에 다녔다. 실업고교를 졸업한 뒤 한 방직회사에 취직해 양단, 공단 등을 짜는 생산직공으로 일했지만 그것도 5·16이 일어나면서 ‘군미필자 우선퇴출’ 방침에 따라 취직 3~4년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부모없는 단독 부양책임’을 맡은 터라 군대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후 손가방에 각종 잡화를 넣어다니며 행상노릇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다가 ‘평생 이렇게 떠돌며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찾아간 곳이 한약방이었다.

평소 알고지내던 한 한약사의 한약방을 들락거리며 일을 배운 뒤 자격시험에 합격, 1970년부터 한약사로 자립했다.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은 곧바로 부모님 산소부터 달려가서 울었습니다. 처음엔 약장을 준비할 돈조차 없어 다른 분께 도움을 받았을 정도였지만 그뒤론 어쨌든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안정을 하게 된거죠.”


로맨스 암호에 적어놓았다가 들키기도

생전에 그리도 일기쓰기에 관심을 보이시던 어머니의 뜻을 받아 이제껏 단 한번도 일기를 거른적이 없다. 어딘가 여행으로 자리를 비울 때도 일단 메모를 해와서라도 일기는 제 날짜대로 꼭 남겼다.

대개는 하루 한페이지가 보통이지만 1964년 9월8일 TV를 통해 당시 덕수궁 국회의사당에서 김대중 대통령(DJ)을 처음 보던 날엔 <근 한시간동안이나 쪽지 하나 보지 않고 막힘없이 연설하는 것을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소감을 비롯, 장장 8쪽이나 써내려간 ‘예외’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역사적인’ 날은 현재 여섯살인 첫 손주 규랑이를 얻던 날. 이런 날은 일기가 아니라 숫제 시가 튀어나온다. <환한 달빛이나 꽃색이 아무리 빼어나게 예쁜들 내 방의 손자 얼굴만 하겠는가.> 박씨 자신의 마음 속까지 조목조록 펼쳐져 있다.

가끔은 자신의 일기 덕분에 웃지 못할 일도 겪는다. 10여년전엔 처가 문중과 관련된 한 민사소송에서 재판부가 박씨의 일기를 증거자료로 채택, ‘우기고 말고도 할 것없이’ 바로 승소로 이어진 일이 있다.

때로는 팔자에 없는 ‘심판’ 노릇을 보기도 한다. 지난주만 해도 누군가 흥분된 목소리로 “1982년 쌀값이 얼마냐”고 묻는 전화를 받았다. 알고본 즉 전화를 건 사람은 1982년 당시 누군가와 나락으로 돈거래를 했다가 시비가 생겨 한창 싸우던 중이었다.

그러다 그의 일기 소문을 듣고 급히 전화를 걸어 최종판정을 구한 것. 결국 그가 뒤져본 일기속엔 1983년 쌀값이 동결되기전 5만6,000여원으로 씌어있었고 그것을 알려주면서 그들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사실 그의 부인도 일기를 쓰려고만 들었다면 쓸 게 많을 것이다. 특히 남편의 일기 때문에 수시로 잠을 방해받은 그녀다. 박씨가 일기를 쓰는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새벽 너댓시경. 부인이 자든 말든 그 시간이면 박씨가 어김없이 일어나 방에 불을 켜고 부시럭거리는 통에 잠 한번 푹 자보지 못했다. 한때는 타박도 해봤지만 결국 포기한 것은 부인쪽. 고집센 남편 때문에 차라리 부인이 적응하는 편이 빨랐다.

또한가지의 비화. 낙천적인 성격에다 친절한 매너로 여성들에게도 제법 인기가 있었던 박씨는 한때 자신의 로맨스(?)까지 스스로 개발한 숫자형 가차문자로 일기에 적다가 어느날 그것을 해독해 낸 부인에게 들켜 한바탕 혼이 난 적이 있다. 너무 꼼꼼한 것도 탈.


대형금고에 보관“일기박물관 만들었으면”

1997년 기네스 기록을 얻은 후 더 힘이 솟는 박씨다. 최근엔 서울 호암아트홀, 서초구청 등지에서 일기전시회를 열었고 여러 학교로부터 전시며 강연초청을 받기도 한다.

자신의 한약방을 찾은 환자나 아이에게도 곧잘 일기쓰기를 권하는 ‘일기 할아버지’일뿐만 아니라 그의 집 자체도 본격적인 ‘일기가문’으로 진입중. 보훈병원 의사인 아들 내외의 며느리 역시 결혼 무렵 알고보니 약 17년간 일기를 써 왔던 여성으로, 그에겐 ‘선조가 맺어준 인연’이나 다를 바 없다.

현재 그의 일기와 가계부, 처방전 등은 4단짜리 튼튼한 대형금고에 모셔져 있다. 화재가 나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장치다. 1970년대 언젠가 부엌 아궁이의 불이 번져 자칫하면 일기장을 태울 뻔 했던 그인지라 여유가 생기자마자 가장 먼저 마련한 장비다. 비밀번호는 박씨만이 아는 대외비. 가족에게조차 가르쳐준 일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을 꺼내 자신의 아랫대쯤에서 일기 박물관으로라도 꾸몄으면 하는 박씨의 바람을 그의 자녀들은 이미 간파하고 있다.

“통탄할 일은, 그 유명한 ‘안네의 일기’는 고작 3년4개월간 쓴 걸로도 그렇게 세계적 베스트셀러에다 국보대접을 받는데 왜 우리는 그게 안되나 하는겁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일기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일기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가치있는 일입니다. 꾸준히 일기를 적으며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다보면 요즘 시끄러운 교육문제니 사회문제니 하는 것도 절로 잡히게 돼 있습니다. 단, 한번 쓰다마는게 아니라 꾸준히 써야지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입력시간 2000/05/0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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