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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CF 등 모든 장르의 '감초'

“정치권은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 수치가 너무 높습니다.”

총선을 앞둔 얼마전 환경운동에 몸담고 있는 어느 인사가 정치권의 혼탁한 행태를 보고 인터뷰에서 던진 말이다. 얼핏 들으면 이해가 안갈지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치권이 ‘썩었다’는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거 참 기발하군’하는 생각과 함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정치권에 대한 유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환경운동과 연계해 만들어낸 기가 막힌 한마디다.


“잘가∼, 내 꿈 꿔∼.”

지난주 MBC-TV 사극 <허준>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너무 웃긴 상황이 연출돼 황당하기까지 했다. 극중 사냥꾼으로 나온 한 탤런트의 이같은 대사 때문이다. 치명적인 웃음이었다.

대사의 출처는 휴대폰 광고. 조성모 이정현 등 인기 가수들이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 광고의 ‘잘 자, 내 꿈 꿔’라는 대사에서 따온 말이다. 사극(史劇)의 대사는 점잖고 진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시청자들은 최신 유행어를 고전에서 접했다는 충격적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순간 이러한 충격은 화학작용을 거치며 폭소로 변화하게 됐다.

CF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 연극 영화 등 거의 모든 장르에 유머러스한 대사와 장면이 양념처럼 들어간다. 이별을 소재로 만든 한 휴대폰 광고도, 연기자는 울고 있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면에서도 연기자들은 피섞인 침을 뱉으며 농담을 던진다. 가슴을 후벼파는 짙은 슬픔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도 곡과 곡 사이에 우스개 소리 던지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당의 운명을 놓고 설전을 벌이는 자리에서도 농담 한마디 절대 잊지 않는다. 신문마다 있는 ‘말 잔치’ 코너를 장식할 만한 멋진 코멘트가 넘쳐난다.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논쟁 속에도 필살기 유머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정치인의 능력은 이미 그들의 정치력을 뛰어 넘었을 정도.


엄숙주의 비웃는 '깔보기 정신'

그러나 이렇게 우스개 소리가 넘쳐나는 현상을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TV를 통해서다. 요즘은 TV를 켜면 여기 저기서 웃고 떠들고 난리다. 정작 실컷 웃어보라고 만든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은 사라져가는데 너도 나도 코미디언·개그맨이 된다.

방송사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는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주말드라마도 코믹 요소로 넘쳐난다. 심지어는 출연자들의 극중 이름도 최대한 최소한 전남자 전남도 등 ‘아예 처음부터 웃기자’는 식이다.

가수도 예외일 수 없다. 컨츄리 꼬꼬(탁재훈 신정환)는 노래보다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 시선을 잡아챈 유머를 선보인 후 가수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들 뿐아니라 유채영 김장훈 이승환 김지훈 등은 바로 개그 프로그램에 투입돼도 손색 없을 정도로 기발하다.

이제 프로그램 재미의 요소, 2H중 휴머니즘(Humanism)의 비중은 점점 작아지는 대신 유머(Homour)는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한마디로 유머 만능시대로 접어들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은 유머를 생산해낼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정도가 됐다.

이러한 유머 만능주의 의식이 저변에 깔리게 된 이유는 뭘까.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이같은 코미디 우선주의의 만연은 사회 기득권자의 엄숙주의를 비웃는 투철한 ‘깔보기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유머러스하게 비꼬는 말은 더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정치인 뿐아니라 방송가 주변에서도 무게 잡는 사람은 예외없이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 일례로 목소리 깔고 젊잖은 척 연기하는 탤런트 최모씨는 후배 연기자들이 토크 프로그램에 등장해 그를 흉내내며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순식간에 최모씨는 최신 유행 유머의 대상이 됐다. 그곳엔 ‘당신만 멋있고 젊잖을 수는 없다’는 물귀신 작전도 포함돼 있다.

둘째 테크놀로지 만능 사회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술이 발전한 만큼 인간이 소외됐다는 점이다. 아무 감정없는 기계에 묻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힘겹고 지칠 때 들려오는 한마디의 농담은 이미 농담의 가치를 넘어선다.

또한 컴퓨터 없이는 하루도 생활할 수 없는 인간은 그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따스함과 여유를 상실했다. 컴퓨터는 농담으로 표현되는 정과 여유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짜증이 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주고 받는 농담과 유머는 컴퓨터로 표현되는 하이테크놀로지 사회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할 수 있다. 또한 유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 소외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의 빛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미 밴 유머여야

셋째 광고의 영향이다. 광고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비단 정보 제공만이 아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유행어의 대부분은 광고에서 따온 말이다.

광고 이론에서 내세우는 ‘운명적 순간’(fatal moment·상품 구매를 결정하는 순간, 약 2초로 추정됨)에서 가장 유효 적절하게 구매자를 유혹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유머라는 말이다. 순간적인 효과에는 그만이라는 말이다.

당분간 모든 분야에 있어서 유머(혹은 개그) 만능 시대는 지속될 듯 하다. 지난 2년간 한국 사회는 혹독한 경제 위기의 과정을 거쳤고 앞으로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그저 농담처럼 살아온 듯한 시기였다. 힘들수록 여유를 가지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들이다.

여기에 인생을 가볍고 재미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 여기는 젊은 세대들이 대거 등장해 유머의 유효 분포 영역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유머는 양념일 뿐이다. 양념만으로는 요리를 만들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미를 상실한 유머는 허탈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오태수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ohyes@dailysports.co.kr

입력시간 2000/05/03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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