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마침내 칸영화제(5월10일-21일) 본선에 올랐다. 75년 역사의 한국 영화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사실 장편영화의 칸영화제 본선진출은 한국 영화의 꿈이었다. 우리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상업성을 지향하면서도, 예술주의나 작가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중성. 베니스나 베를린처럼 지나치게 폅협하지도, 특정 색깔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예술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칸영화제야말로 우리 영화인에게는 ‘구원의 문’과도 같았다.

그래서 지난해 송일곤의 ‘소풍’이 단편경쟁에 올라 심사위원상을 수상해도 여전히 장편영화의 본선진출과 수상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못했고, 매년 비경쟁부문인 감독주간이나 주목할만한 시선, 비평가주간에 우리 영화들이 얼굴을 내밀어도 시큰둥했다.

오직 칸영화제 장편 본선진출과 수상타령이었다. 임권택 감독과 오랫동안 손잡고 영화만들기를 해온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에게 소원을 물어보면, 욕쟁이인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왔다. “영화로 돈 벌 생각없어. 칸영화제에 나가 제작자로 상 한번 받아보고, 시상대에서 내가 이 영화만든 제작자라고 한마디 할수 있다면 원이 없겠어.”

감독도 마찬가지다. “비록 지금은 어쩔수 없이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기획영화, 철저한 상업영화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칸영화제에 진출하는게 목표라고 꿈”이라고.

물론 본선경쟁을 말한다. 영화가 산업이고, 기술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영화는 결국은 예술이고, 그 예술의 가장 권위있는 평가는 칸영화제라고 믿고 있다. 일본은 벌써 1970년대 수상작을 내기 시작했고 중국도 ‘죽의 장막’이 걷히자마자 장이모 첸카이거가 칸에 진출해 우리를 부럽게 만들었다.

홍콩은 왕자웨이라는 영상파 감독이 나타나 자존심을 세웠고, 우리보다 제작여건이 훨씬 열악한 이란도 당당하게 거장 키아로스타미를 앞세워 칸에 입성했다.

우리 영화인 모두의 꿈이 이렇고 우리와 인접한 나라들의 사정이 이럴진데 왜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한번도 본선에 오르지 못했을까. 칸영화제 본선은 예나 지금이나 거장, 작가주의 스타감독을 숭배한다. 그것은 그들의 영화인생에 대한 존경이기도 하고, 영화제의 권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올해 본선진출한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 이란의 마흐말바프, 홍콩의 왕자웨이, 대만의 에드워드 양, 영국의 켄 로치,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미국의 코헨 형제, 영국의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거장이 없었고, 작가주의 스타감독을 만들지 못해왔다는 얘기다.

임권택 감독만 해도 그렇다. 칸영화제가 10여년전부터 그를 주목해왔다. 그러나 작품을 내라고 할 때 그에게는 내놓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때 그는 흥행영화 ‘장군의 아들’을 세 편이나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를 임감독은 “운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3, 4년 잊혀졌다 ‘서편제’로 다시 주목을 받은 후에도 그는 예술성과는 거리가 있는 ‘창’을 찍었고 ‘축제’는 완성도가 모자라 주목할 만한 시선에 출품을 제안받는 수준에 그쳤다.

칸영화제 본선으로 가는 또하나의 길인 작가주의 스타는 감독주간, 주목할만한 시선 등을 통과하면서 얻어진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감독은 어쩌다 한번 얼굴을 내밀고는 그 다음부터 흥행과 타협해버린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이 1998년 ‘강원도의 힘’에 이어 이번에 ‘오, 수정’으로 두번이나 주목할만한 시선에 나가는 것이 반갑다. 거장이라고, 작가주의 감독이라고 상업영화와는 담을 쌓고 오직 ‘예술’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거장은 자신의 예술세계와 한 나라의 영화를 깊이있게 천착해야 하고 관객은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것보다 남의 것에 물들어 ‘춘향뎐’의 실험성과 독창성을 과소평가하고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거장은 언제나 안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입력시간 2000/05/0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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