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향기도 옥빛 물줄기에 취한 듯

강원도 깊은 골짜기에 술이 솟는 바위샘이 있었다. 양반이 잔을 들이대면 청주가, 천민이 잔을 놓으면 탁주가 솟았다. 한 천민이 양반복장을 하고 청주를 기대했지만 바위샘은 용케 알아채고 탁주를 부었다. 이 사람은 화가 나서 샘을 부숴버렸고, 이후 술 대신 맑은 물만 흐르게 됐다.

이 술샘 이야기가 전해지는 땅은 강원도 영월군 주천(酒泉)면이다. 실제로 그 곳에는 반쯤 깨어진 술통같은 샘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유래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지금 주천에 술은 흐르지 않지만 술처럼 향기로운 강이 흐른다. 주천강이다.

평창군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뱀처럼 몸을 뒤틀며 백두대간 서쪽 기슭을 타고 남하한다. 주천을 지나 영월에서 서강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동강과 만나 남한강이 된다.

봄이 되면 주천강은 진해진다. 청주보다 맑은 옥빛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씻어내리고 강어깨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연이어 핀다. 지난주 내린 비로 강물은 더욱 싱싱해졌다. 춘풍과 춘색에 저절로 취기가 오른다.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곳은 요선암과 요선정이다. 주천면 바로 북쪽의 수주(水周)면에 있다. ‘물로 둘러싸인 마을’ 이란 뜻의 수주면에는 ‘무릉도원’이란 글을 사이좋게 나눈 무릉리와 도원리가 나란히 있다. 요선암과 요선정은 그 무릉과 도원의 접점이다.

요선암은 수백개의 너럭바위 군락이다. 물에 씻겨 반들반들한 화강암 덩어리가 각기 다른 크기와 모습으로 강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넓은 것은 20여명이 올라앉을 정도. 깊게 팬 골마다 강물이 흘러들어 자연욕조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중기 풍류가로 평창과 강릉부사를 지낸 봉래 양사언이 이 곳 경치에 반했다. 그는 큰 바위에 ‘신선이 노는 바위’라는 뜻의 요선암(邀仙岩)이란 글자를 썼고 그대로 이 곳의 이름이 됐다.

요선정은 요선암 옆 절벽에 만들어진 정자이다. 원래 암자가 있었던 이 곳에 1913년 수주면에서 계를 부어 정자를 지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마애석불(석가여래좌상)과 5층석탑이 불교도량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흔들바위처럼 생긴 타원형의 돌에 새겨진 마애석불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요선암을 내려다 본다. 정자에는 숙종, 영조, 정조의 친필 어제시가 보관되어 있다.

주천강 여행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은 사자산 법흥사이다. 주천강의 지류인 법흥천이 사자산에서 발원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자산을 ‘세속을 피해 살 곳’으로 표현했다. 험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의미일 듯하다.

그래서인지 불교의 향기가 진하다. 법흥사는 7세기 중엽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 구산선문의 하나로 꼽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5개의 적멸보궁 중 하나가 법흥사에 있다. 적멸보궁은 최근의 중층불사로 새단장을 해서인지 고풍스런 멋을 많이 잃었다. 절 입구에 서서 산기슭을 바라보는 고즈넉한 산신각과 그 옆의 징효대사탑비(보물 제612호)가 세월의 깊이를 말해준다.

주천강변은 예전에는 오지였지만 1989년 포장도로가 뚫리면서 외지인에게 알려졌다. 중앙고속도로 신림·주천IC에서 빠져 좌회전, 88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23㎞를 가면 주천리이다. 마을을 지나 평창방면(597번 지방도로)으로 약 1㎞를 달리다 법흥리 쪽으로 좌회전해 약 4㎞를 지나면 요선암, 10㎞를 더 들어가면 법흥사이다. 영월-주천 사이 시외버스가 하루 12회, 주천에서 법흥사에 닿는 시내버스가 4회 운행된다. 주천버스터미널(0373-372-7107).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0/05/0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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