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가도 황토길이다. 가도가도 붉은 산이다. 이따금 어린 소나무가 보이나 내 나이처럼 어리구나.” 이제는 우리 곁에서 잊혀져버린 병든 서울의 시인 오장환의 ‘붉은 산’의 한 구절이다.

해남 가는 길은 ‘붉은 산’처럼 적절한 표현은 없다. 이따금 보리밭이 보이지만 모두 황토의 황량한 들판이다. 한국 도자사(陶磁史)에 독특한 패턴과 뉘앙스를 지닌 ‘녹청자’(綠靑磁) 찻그릇을 제작했던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로 찾아나서는 날은 황토바람이 몹시 불었다.

항상 매화차처럼 그윽한 향을 지니고 있는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의 강순형 관장이 귀한 시간을 내주어 찻그릇 역사기행의 맛을 더해주었다.

녹청자 가마터가 있는 산이면 진산리와 초성리 해안은 양쪽으로 해남 화원반도와 영암 삼호반도가 좌청룡우백호로 지켜서 있고 구릉지대를 따라 녹청자를 구울 수 있는 질좋은 모래가 섞인 점토광맥이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다. 해안과 인접해 있는 거대한 녹청자 가마터는 고화도의 도자기를 생산하고 운반할 수 있는 천혜의 지리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광활한 농경지로 변해버린 과거 속의 뱃길. 해안 백사장을 따라 풍우와 해수로 침식된 구릉지대에는 녹청자 도편이 수없이 퇴적되어 있어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져버린 시간들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이곳 가마터에서 발견된 녹청자 도편을 보면 대부분 서민의 생활용기이며 찻그릇도 일부 포함이 되어 있다.

해남 녹청자 찻그릇은 인근 영암 구림리의 하이테크적 도기의 발전으로 제작되었다. 그 역사적인 배경은 신라말,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종(禪宗)도입으로 이 지역 사찰에 음차의식(飮茶儀式)이 대유행했던 것이다. 특히 9세기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 장군의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해상활동에서 차와 도자기를 비롯한 많은 문물의 교역은 우리나라 차문화와 청자 문화 발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곳 산이면 일대의 녹청자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찻그릇 도편중에는 청자 발생의 기원과도 밀접한 9세기 중국 오월(吳越)국에서 유행하던 해무리굽 형태를 한 찻그릇 도편이 발견되고 있어 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해남 녹청자 가마터는 신라말 영산강 유역의 영암 구림리, 강진, 고흥 청자 가마터와 서로 연결되어 발전된 것이다. 1983년 12월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인양된 3만점에 달하는 녹청자들은 당시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녹청자 수송선의 난파로 인해 침몰된 유물이다.

뭇 세월 풍우창파에 시친 옛 가마터 언덕에 촘촘히 깔려있는 유약 원료로 사용된 조개 껍질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옛 사기장인의 지혜를 느끼게 한다.


녹청자란?- 불의 변화가 빛저논 오묘한 색

1983년 해남군 산이중학교 학생 김태균군에 의해 발견된 녹청자 가마터는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5년 사적지 301호로 지정되었다.

녹청자란 모래가 섞인 점토로 기형(器形)을 만들고 그 위에 엷은 칼슘 유약을 입힌 다음 기형을 보호하는 외피에 넣어 가마에서 고온 환원불로 구운 자기를 말한다.

녹청자의 유약 색깔은 갈(褐), 황(黃), 녹(綠), 청(靑) 등 단색 또는 다양한 색상이며 고온의 가마속에서 불의 변화에 의해 생기는 독특한 맛을 보여주고 있어 청자와 쉽게 구별이 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약은 청자와 같이 조개껍질을 매용재로 한 칼슘 유약을 사용하였고 지금도 이러한 조개껍질은 이곳 해안을 따라 전파되어 멀리 경남 하동 사기 마을 도요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녹청자 연구가인 조기정 선생에 의하면 녹청자는 이미 신라말에서 고려 초엽인 9∼10세기 경에 발생되었고(일부 학계에서는 고려말 청자의 쇠퇴기에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토기에서 자기 문화의 대혁명으로 가는 과정에서 민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곳 산이면 가마터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

입력시간 2000/05/0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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