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니믄/ 남 그스지 얼어두고/ 맛둥방을/ 바메 몰 안고 가다’

신라시대 4구체 향가인 서동요(薯童謠)다. 요즘 말로 옮기면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숨겨두고/ 서방님을/ 밤마다 몰래 만난다’는 뜻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요에 얽힌 설화는 이렇다. 백제 무왕(武王)은 어린 시절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고구마를 캐는 서동(薯童)으로 위장, 서라벌로 잠입한다

무왕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얻기 위해 서라벌 어린이에게 서동요를 유행시켰다. 마침내 노래가 대궐까지 퍼지자 노래 내용을 사실로 믿은 진평왕은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며 선화공주를 대궐밖으로 내쫓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억울하다”는 선화공주의 하소연은 무시됐고 무왕은 대궐에서 쫓겨난 선화공주를 손쉽게 백제로 데리고 와 결혼할 수 있었다. 서동요에 얽힌 설화는 소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선화공주는 분명히 품행이 방정한 공주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결과는 세상 사람이 믿는 대로 흘러갔다.


꼬리 문 '현대 위기설'

지난 4월26~27일 이틀 동안 주식시장에서 벌어졌던 ‘현대 쇼크’는 실체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일단 누구나 ‘그럴 듯하다’고 믿을 만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확실히 보여준 사례다.

4월26일 오전 10시20분. 전날 미국 나스닥 시장의 폭등세로 신나게 출발했던 주식시장에 갑자기 ‘현대 위기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현대투신이 참여연대로부터 펀드 운용의 비도덕성을 지적받았고 정부의 투신권 지원대책에서 현대투신이 제외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우에 이어 현대마저 잘못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흘러 나왔다.

파장은 상상을 초월했다. e-미래에셋증권 등 증권사 창구로 현대전자 매물이 폭주했으며 그 영향은 현대그룹 계열사와 다른 대형 우량주로도 확산되는 등 충격의 여파는 계속 증폭됐다.

이날 현대그룹 계열사 중에서는 현대전자, 현대증권, 현대자동차, 현대상선 등이 하한가를 기록하는 등 대한알미늄을 제외한 전종목이 내림세를 탔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 계열 상장주식 시가총액은 이틀동안 20%나 줄었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4월27일 종가기준으로 현대그룹 계열 상장주식 시가총액은 18조688억원으로 ‘현대 쇼크’가 터지기 직전인 4월25일(22조1,345억원)에 비해 18.4%나 떨어졌다. 금액으로 따지면 4조657억원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현대그룹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대그룹은 4월26일과 4월27일 이틀동안 백방으로 진화에 나섰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현대는 지난해 2조3,000억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올해에도 4조5,000억원의 이익을 올릴 계획”이라는 현대그룹의 발표를 그 누구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현대 쇼크’는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이 나선 뒤에야 겨우 해결됐다. 4월27일 외환은행의 독일계 부행장이 직접 나서 “현대의 자금 사정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해명한 뒤에야 현대그룹의 주가는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대우사태, 남 얘기 아니다"

그렇다면 이틀간 벌어졌던 ‘현대 쇼크’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단 주식시장에서는 ‘일과성 해프닝’이라는 의견과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보다 큰 일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라는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일과성 해프닝’이라는 주장. 이들은 현대그룹 계열사의 펀더멘탈은 튼튼하며 단순히 현대주식의 수급 불균형 때문에 이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A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현대는 지난해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전자, 현대증권, 현대중공업, 현대상선 등 상장회사의 자본금이 두배 가량 늘었는데 이것이 현대그룹 주가폭락의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또 이번 사태는 현대투신과 현대투신운용이 공적자금 투입대상에서 제외된 것에 따른 주식시장의 실망이 반영된 것일뿐 현대그룹 전체의 사업전망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즉, 당초 현대투신에도 한국투신, 대한투신과 마찬가지로 공적자금이 투입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같은 예상이 빗나가면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SK투신의 장동헌 펀드매니저는 이와 관련, “반도체 호황에 비춰볼 때 현대전자는 과매도 상태로 보인다”며 “주식을 팔기보다는 사고 싶은 쪽”이라고 말했다.


경영권 불안정 등 불투명 상황 많아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대 쇼크’는 절대로 일과성 해프닝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현대그룹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1년이 넘었다.

이번 사태는 말로만 떠돌던 소문이 처음으로 현실화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2000년 5월 현재 현대그룹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1998년 이후 기아자동차, LG반도체, 금강산 사업 등 방만한 확장경영으로 내실이 크게 흔들린 상태며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정몽헌 현대전자 회장의 경영권 다툼처럼 경영권의 불안정 역시 현대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또 자동차, 대북사업 등 현대그룹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주요 사업 역시 앞으로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대그룹이 이번 사태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긴다면 결국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현대그룹이 이른 시일내에 계열분리, 전문경영인의 독립성 보장, 소액주주의 권리존중 등에 나서지 않을 경우 시장은 보다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 최대 재벌을 자부하는 현대가 서동요의 교훈을 잊지 않아야 할 시점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04 17:18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