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실시가 유력한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 정계 실력자의 은퇴 결심이 잇따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각각 자민당과 공명당을 주물러온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총리와 이시다 고시로(石田幸四郞) 공명당 상임고문의 은퇴 결정은 세대교체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두 사람은 1980년대 후반 당권을 장악했고 후진에게 당권을 물려준 후에도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 남았다. 이런 막후 실세를 일본에서는 ‘고켄샤’(後見者·후견인)라고 점잖게 부른다.

후견인이 되는 최대의 비결은 집금력(集金力)이다. 역대 자민당의 ‘고켄샤’는 강력한 집금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발휘해왔다. 돈만 잘 모은다고 누구나 ‘고켄샤’가 될 수는 없다.

파벌의 대내외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정력과 친화력도 갖추어야 한다. 말하자면 내부의 검증 절차를 거친 사람만이 ‘고켄샤’가 됐고 국민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잦은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치안정과 장기적 정책 수행을 가능하게 한 순기능도 있었다.

반면 이런 검증을 받은 적도 없는데도 집금력과 친화력을 발판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고켄샤’ 대신 ‘구로마쿠’(黑幕)라는 어두운 어감의 말로 부른다.

한자 복합어를 앞부분은 뜻으로, 뒷부분은 소리로 읽은 말이다. ‘검은 장막’이라는 원뜻은 같지만 ‘감추어진 내막’이 아니라 ‘배후에 숨어 사태를 장악, 조절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우리의 ‘흑막’과는 의미가 다르다.

전후 일본 최고의 ‘구로마쿠’는 록히드사건 당시의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다. 후쿠시마(福島)현 출신인 그는 청년기를 우익활동으로 채웠고 정부요인 암살 계획 등으로 잦은 옥살이를 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군부와 손잡고 물자조달로 거금을 손에 쥐었다.

패전후 A급 전범으로 스가모(巢鴨)감옥에 들어갔으나 1948년 석방됐다. 자민당의 모태인 자유당 결성에 깊이 관여하는 등 주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정계와 밀착했다.

그가 일본 정계의 ‘구로마쿠’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미 중앙정보부(CIA)의 지원이 커다란 힘이 됐다는 정황 증거는 많았으나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1976년 록히드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이름은 일본 열도를 흔들었다. 록히드사와 대행사 계약을 맺은 그는 트라이던트 여객기를 젠닛쿠(全日空·ANA)사에 팔기 위해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접근, 5억엔의 뇌물을 전했다.

젠닛쿠가 기종을 트라이던트로 갑자기 바꾼 것은 물론 항공자위대의 대잠수함 초계기 사업 등도 흔들렸다.

일본 국민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다나카 총리를 쥐고 흔든 그의 진면목에 커다란 호기심을 표했다. 정계가 발칵 뒤집힌 대형 사건의 진상을 쥔 그는 병을 이유로 병원에 틀어박혀 국회 청문회 증인석에 서지 않았다.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1981년 결심했으나 판결이 나기 전인 1984년 눈을 감았다. 그는 한일협정 이후의 대한 경제지원에도 관여, 거액의 리베이트를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다마에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본 선박진흥협회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1899~1995)도 ‘구로마쿠’였다.

오사카(大阪) 출신인 그도 청년기의 극우 활동이나 전후의 A급 전범 수감과 석방 등은 12살 아래인 고다마와 판에 박은 듯 같다. 다만 돈을 만들고 쓰는데 있어서 상당부분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고다마와는 달랐다. 일찍이 경정(競艇)사업에 눈떠 그 보급에 힘쓴 결과 1951년 전국경정연합회 회장으로 막대한 수익금을 운영하는 위치에 올랐다.

1962년 경정 수익금을 공익사업에 배분하는 일본 선박진흥회를 설립, 이를 기반으로 각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물의를 빚는 한편으로 아시아 각국의 공익사업을 지원, 유엔 평화상을 받았다. 1963년 통일교의 일본 진출에 협력, 고문을 맡기도 했으며 선박진흥협회의 ‘일본재단’은 한국 학계에까지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는 ‘구로마쿠’ 대신 ‘픽서’(Fixer)로도 불렸다. 좋지 못한 일의 알선·중개인을 뜻하는 말로 ‘구로마쿠’보다는 한단계 낮다.

이런 쪽으로 가장 높이 올라간 한국인으로는 ‘간사이(關西) 정재계의 픽서’로 불리고 있는 재일동포 허영중(許永中)씨가 꼽힌다. 고다마나 사사카와의 예에서 보듯 ‘구로마쿠’는 극우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일본이 과거청산에 실패한 원인(遠因)을 ‘구로마쿠’의 존재를 통해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5/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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